주님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인 공의와 진노를 생각하다 가장 완벽하게 잘 보인 사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주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고 벌을 주셔야 했다.
그런데 또 자비로우시기에 우리의 인내심으로 이해되지 못할 만큼 죄인을 기다리시고 수많은 기회를 주시고 용서하신다. 죄인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인류 모두에 해당한다.
공의와 자비를 모두 세우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창세기 3장에서 인류는 죄를 지었고 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되어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가 분리되며 하나님이 두려워 피하고 자신의 수치를 보며 상대를 비난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님께 분리된 인간은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가 점점 악행만 저지르고 형제를 죽이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자기가 왕 되어 살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창세가 3장 죄가 들어온 이래 인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시고 베푸시고 공급하시고 보호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을 보느라 이것을 보지 못하고 외면한다.
주님은 죄에 대한 반드시 심판과 벌을 내리셔야 했다.
그렇다면 인류는 전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방법이 필요하셨다.
그것은 죄가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주신 해결책이자 약속, 예수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내려진 벌을 모두 대신 받으신 존재다.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신 존재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하나님의 공의를 감당하시기 위해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의 잔을 받으셨다. 흠이 없고 주님 말씀 그대로 완전하게 살았던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
죄 없는 예수님이 공의를 담당하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고 죽으셨고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죽을 때까지 죄밖에 없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자비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정의를 완전히 뒤집으셨다.
착한 사람이 벌 받고 나쁜 사람이 구원받게 하셨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온전히 착할 수 없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던 우리의 죄문제를 너무 잘 아시기에 죄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벌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하셨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에게 무한한 용서와 자녀로 삼아주신 자비를 베푸심으로 아무리 극악한 잘못을 한 죄인이나 주님 모르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았던 자들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이렇게 온전한 자비를 완성하셨다
억울하다, 평등하지 못하다, 공정하지 못하다 하며 외칠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할 심판과 벌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오히려 자녀 된 특혜를 누린 자로서, 주님과 다른 사람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내가 잘해서, 잘 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얻어 낸 무슨 대가가 아니라, 엉망진창인 죄인인 내게 주신 한없는 자비와 내 인생 전체를 구원받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아마,
예수님이 그리 하셨던 것처럼,
나는 정정당당하고 상대가 큰 잘못을 했다면 상대와 나의 자리를 바꿔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억울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내게 행하셨는지를 정확히 안다면,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따지고 벌하기보다는 주님께 억울한 마음 토로하는 한이 있어도 내가 상대를 정죄하거나 벌주지 않는 것, 나는 이미 많은 죄를 주님께 구원받았으니 상대가 나에게 한 죄를 벌하거나 심판하려 하는 대신 그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고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거기서 힘을 얻고 주님 명령하신 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