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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Apr 11. 2021

나의 모든 로망은 호텔에서

집에 대한 몇 가지 로망이 있다. 서재, 드레스룸, 홈바, 트레이닝룸, 홈 가드닝 테라스 등 집을 잠자고 생활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집안팎의 잉여 공간을 다양한 목적으로 즐기고 싶은 것이다. 특히나 아직 어느 한 나라에 정착하지 않고 10년 넘게 노마드 호텔리어로 살고 있는 탓에 이런 집에 대한 로망은 더욱 커져만 가는 것 같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호텔에서의 삶을 통해 조금씩이나마 집에 대한 나의 로망을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호텔로 이동했을 때에는 월세 계약하기 전까지 호텔에서 한달살기를 했다. 워낙 월세가 비싼 나라이기에 아파트먼트 한 달 월세로 3성이나 4성 호텔에서 한달살기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운이 좋게도 로열티 멤버십을 사용할 수 있던 한 호텔에서 멤버 전용으로 2+1 프로모션을 진행하였기에 주저 없이 예약을 넣었다. 출근하는 통근버스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할 수 있고 싱가포르 도심에서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일석이조였다. 


그리고 이 호텔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나의 오랜 로망이었던 로프트 타입의 객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층은 조그마한 리빙룸과 욕실, 2층은 침실로 구성된 곳이었는데, 특히 2층 침실 공간이 아늑한 다락방 같아서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다락방을 탐험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매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심으로 돌아간 나는 2층의 침대에 누워 한국의 막장드라마만 주야장천 보았다는…


보통의 호텔 객실에선 이런 로프트 타입의 객실을 잘 접할 수 없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유난히도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호텔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아마도 좁은 땅덩어리를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였겠지. 싱가포르에서 살 곳을 알아보면서 콘도나 스튜디오 타입의 주거지에서도 로프트 타입을 쉽게 만나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들은 호텔의 그것과는 다르게 천장이 높은 편이 아니라서 비좁은 감이 있었다. 거기다 족저근막염까지 겹치면서 아침에 일어나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통증이 심해져 결국 월세 계약은 평범한 원베드 룸으로 최종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로프트 타입에 대한 로망은 호텔에서의 한달살기 경험을 시작이자 끝으로 위시리스트에서 삭제하였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는데 호텔에서 한달살기로 딱 적당히 맛본 것 같다. 


미드 <Sex and the city>의 캐리의 집을 보면서 그녀의 드레스룸을 항상 동경해 오기도 했다.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 때도, 혼자 자취를 할 때도, 그리고 해외에서 자취를 할 때도 한 번도 드레스룸을 만들 수 있는 잉여 공간이 있는 집에서 아직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나만의 드레스룸을, 아니 그냥 작은 옷장 코너라도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특히나 내가 이 드라마에 빠져 지냈던 2000년대 후반, 일본에서 베트남으로 호텔을 이동을 하게 되었다. 4평짜리 교토의 작은 원룸에서 거실에서 방까지 긴 복도가 있는 하노이의 4 베드룸 호텔 레지던스로 사는 곳이 순식간에 업그레이드되었다. 4 베드룸이라 같은 호텔에서 일하는 일본인 세일즈 매니저와 함께 플랫 메이트로 지내게 되었지만, 워낙 일하는 시간도 다르고 쉬는 날도 달라 며칠 동안 집 안의 공용공간에서 얼굴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하루는 쉬는 날이라 오후 늦게 일어나 주방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우스키핑에서 플랫 메이트의 세탁된 정장을 가지고 왔다. 보통은 세탁물은 거실에 두고 각자가 퇴근하면 방으로 가지고 갔지만 플랫 메이트가 퇴근할 시간이 꽤 오래 남았기에 방에 걸어두기 위해서 그녀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가 옷장문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옷장 안에서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내가 얼마 전까지 살았던 교토의 작은 방을 발견하였다. 


겉에서 보기엔 그저 거울 달린 클로젯 같았는데 정말 넓은 드레스룸이었던 것이다. 정말 한눈에 반해버렸다. 이런 드레스룸을 오랫동안 꿈꿔왔어! 나보다 먼저 이 객실에 들어와 자리 잡은 그녀가 이 드레스룸이 있는 마스터 베드를 쓰고 있어서 당장 사용할 수 없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곧 퇴사를 할 거라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날부터 그녀가 이사하는 날을 달력에 표시해두고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드디어 디데이가 왔다. 그녀가 짐을 다 옮기고 작별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 난 하우스키핑에 전화를 걸어 청소를 요청하고 바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꿈에 그리던 드레스룸이 생긴 날,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들락날락 거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이후에도 드레스룸을 채운다는 목적으로 쉬는 날마다 옷 쇼핑을 하며 텅장의 고통도 잠시 누리기도 했지만 오랜 드레스룸 로망을 실현시켜 주었던 행복이 더 컸던 시절이었다. 

 

두 번째 베트남 호텔 시절의 인하우스 때에는 처음으로 일반 객실이 아닌 스위트 룸에서 인하우스 생활을 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이 스위트 룸에 숙박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같은 레벨의 스위트 객실과 다른 레이아웃과 전망으로 고객들이 이 방으로 배정을 받으면 나중에 항상 클레임이 들어왔기 때문에 1년 중 대부분의 날들이 방이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비어있을 바에는 인하우스 직원들한테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건지, 이 방은 항상 직원들이 사용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내 차례가 돌아왔다. 역시 존버는 승리한다. 


이 객실에 꼭 숙박하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거실 창문 쪽을 선반같이 사용할 수 있어 그곳에 작은 북 코너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때마다 책을 사고, 그리고 한국에서 친구들이 올 때마다 선물로 책을 사다 줬는데, 그렇게 한 권 두권 모아 온 책들이 어느덧 꽤 많은 양에 달한 것이다. 휴대폰 사진첩에 고이 간직해 둔 암체어가 있는 코지한 나만의 북 코너를 드디어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 흐트러져있던 책들을 한데 모아 무지개 색으로 책 배열을 하기도 하였고, 암체어 옆 작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스탠드 조명과 작은 꽃다발도 장식해두었다. 퇴근하고 객실로 돌아와 씻고 책으로 둘러싸인 이 암체어에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이밖에도 홈트가 가능 객실, 홈바가 있는 객실, 선셋이 멋진 비밀 베란다가 있는 객실, 바다 바로 앞 비치프런트 객실 등 다양한 호텔의 객실에서 살게 되면서 집에 대한 나의 로망들을 하나씩 지워나갈 수 있었다. 


처음 명품백을 샀을 때가 기억난다. 20대 때에는 쉽게 살 수 없는 명품백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몇 번의 명품백을 사보고 써보니 이제는 편하고 가벼운 에코백에 더 손이 간다. 가지고 싶은 명품백도 거의 없다. 처음 샀던 소중하게 잘 간직만 하던 명품백은 지금 당근 마켓에 올라가 있다. 


집에 대한 로망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경험해 보다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로망만 남는 것 같다. 이제는 로프트 구조는 나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드레스룸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비치프런트는 무섭고 술은 되도록 멀리하니 홈바도 바이 바이. 


하지만 책은 더 많고 서재는 더 크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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