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글들을 쓰고 나서, 소설가 이지크 디네센의 문장이 떠올랐다.
모든 슬픔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견뎌질 수 있다
마음에 맺혀있고, 목에 걸려있던 말들을 밖으로 꺼낸다는 것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담고 나니, 그 사건들과 나를 동일시하여 품고 있던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거나, 번데기를 뚫고 나온 나비가 과거에 머물렀던 껍데기를 바라보는 마음이 있다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무도 상처를 받으면 진액을 뿜어 그를 덮는 것처럼, 나를 지키기 위해 감쌌던 방어기제라는 껍질은 오랫동안 나를 보호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세상을 느끼는 감각을 닫히고 마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위로와 기도가 쌓여서, 안정적인 관계 안에서 흐르는 지속적인 사랑 안에서, 겨울의 땅처럼 차갑게 굳어있던 나의 땅들은 봄날의 흙처럼 오랜 시간에 거쳐 점차적으로 보드랍게 부서져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돌멩이처럼 묻혀있었던 딱딱한 씨앗들은 서서히 그 온기와 부드러움 안에서 단단한 껍질을 해체하고, 가장 연하고도 강한 힘을 밀어냈다.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뻗어가고자 하는 의지였고, 빛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픈, 안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벌어져있던, 깊고 넓었던 몸과 마음의 상처는, 손이 닿아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흉터이자 무늬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짙은 향기를 내뿜는 꽃들이 피어났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드러나기까지에는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기도와 무엇보다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했다. 어느 날 밤, 그 느낌을 담고 싶어, 아이들이 잠든 후 오일파스텔로 그렸던 과정을 아래에 정진규님의 시와 함께 나눠본다.
꽃이 피는 순서는 밖에서 안이 아니다
고마우신 햇살과 단비도 있으셨겠지만 안에서 밖이다
일단은 고여서 밖이다
눈으로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 되는 빠듯한 충만의 순서!
나는 그걸 아직 믿고 있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그걸 아직 믿고 있다.
- 정진규, 몸詩 시집 '상처' 中
2020년 어느 날 그렸던, 상처가 꽃이 되는 과정
지난날 겪었던 모든 고통들에 만약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고통을 살갗으로 느끼고, 그를 공감하며, 위로하고, 안아주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마음이 든다.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아파할 때에는 '고통이 축복이다.'라는 역설의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한 발 빠져나와 바라보니,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는 더 큰 그림 안에서의 완성을 위한 의미와 목적이 있었음을 느낀다.
그 뜻을 다 알 수는 없더라도, 저항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때, 고여있던 삶은 다시 흐름을 여러 차례 온몸으로 경험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류시화님의 시도 다시 찾아 읽으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인 흉터가 내게 건네는 말들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이어질 나의 삶은 이런 나의 흉터를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의 흉터들을 보면서,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다시는 영혼을 아픔에 내어주지 않기 위해' 서로를 지키고, 돌보며 살아가는 날들이 될 것만 같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를 위함이다. 내 안에서 피워낸 꽃들의 향기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가슴에 닿기를... 그리고 내게 전해졌던 위로와 사랑이 당신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흘러가기를 기도하며, 서로 안의 상처를 보듬고, 흉터를 쓰다듬으며, 이토록 애써왔으니, 곧 봄이 올 거라고, 곧 꽃이 필 거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서 말이다.
흉터의 문장
류시화
흉터는 보여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냈음을
흉터는 말해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