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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롭지엥 Oct 31. 2020

주재원 아내도 인재상이 있나요?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주재원 아내로 취직했다는 저의 첫 해외생활 몇 년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안 들리는 영국 영어로 살아가야 했지요. 장도 보고 병원도 가야 했습니다.

아이들 학교생활, 방과 후 활동, 교우관계까지 챙기며 흡사 대형 기획사 연예인 매니저처럼 스케줄 관리를 하고 로드 매니저가 되어 가기도 했습니다.

또 겨우 계란 프라이만 할 수 있던 요리 젬병 제가 현지에서 한식 재료를 찾아다니면서 생존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호락호락한 일상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저에게 주재원 아내는 이런 게 필요해하고 알려줬더라면 조금 더 수월하게 지혜롭게 어려운 시간을 헤쳐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독감에 걸려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맞는 예방주사처럼 누군가의 힘듦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예방주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재원 아내 되기 예방주사.  


기업에 취직을 하게 되면 기업의 "인재상"에 따라 그에 맞는 직원을 선발하게 되지요.

주재원 아내로 취직을 하려면 필요한 인재상은 어떨까요?


제가 생각하는 주재원 아내의 인재상 3가지입니다.

미리 맞는 예방주사처럼 인재상 점검해볼까요?


첫째,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아내 (공감)


주재원으로 해외에 파견을 나온 남편들은 참 힘이 듭니다.

현지 업무 적응도 힘들고 한국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과 현지 사무실의 운영도 쉬운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 머나먼 타국까지 온 책임감과 회사의 사명감으로 주재원, 그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매우 무겁습니다.


업종마다 산업 군마다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특히 우리 집 가장의 경우는 새로운 시장 개척의 선봉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중압감과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습니다.

원형탈모로 머리카락은 빠지고 혈압은 자꾸 올랐습니다.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을 견뎌대며 힘들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잔뜩 예민해진 상태로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집안에 들어옵니다.

매일 직장일의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면서,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서는 남편의 얼굴 표정부터 살피는 것이 저의 버릇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들어오면, 오늘은 괜찮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한숨 돌리고

또 어느 날은 잔뜩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귀가하면 그때부터는 아 뭐가 일이 안되고 있구나 직감하고는 저도 같이 심각해졌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힘든 남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최소한 집만큼은 편히 쉴 수 있는 안락한 쉼터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외생활을 하면서 서로에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돼주는 역할.

너무 힘이 들고 지치고 쓰러져 있을 때 손잡고, 같이 울어주는 아내가 되는 것.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든든한 아내 (지원)


뭐하나 쉽지 않습니다. 행정처리가 늦은 영국에서는 기다리는 것이 일상입니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고치는 데도 기본 2~3번은 기사가 방문을 해야 하고, 그마저도 약속 잡고 기다리는 게 다반사입니다. 집안 곳곳에 손이 가는 집안일. 간단하게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아이들 학교에 가서 상담을 하는 일도, 병원에 가는 일도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일'중에 하나입니다.


남편은 회사일로 바쁘고 정신이 없어요.

그리고 아이들 학교, 유치원 행사는 너무 자주 있습니다. 발표회도 기부행사도 잦습니다.

분기별로 학부모 상담도 하는데 낮 평일 시간에 하기 때문에, 남편이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영어나, 그 나라 현지 언어가 자유로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집안일, 아이들 학교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알아서 담당해주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이들 양육과 학교일, 집안일들을 전담하여 남편이 회사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너무 남편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내가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자신감을 장착하시길 추천드립니다.




셋째, 행복한 아내 (성장)


영국에서 만나게 된 분이 계셨습니다.

10년이 넘도록 주재원 아내로 해외생활을 하고 계신 분이었지요.

처음 만나 인사하던 날 저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재원 아내로 생활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요?

바로, 즐겁게 사는 것, 상황을 즐기는 것, 우울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


무릎을 딱 쳤습니다!

해외생활의 초창기에는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고 나의 감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현지 생활에 만족이 찾아올 때 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정체성의 혼란.

이 정체성이라는 놈이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와 다른 차원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온 가족의 현지 생활 적응 프로세스가 안정화되어가고, 더 이상 긴장감도 설렘도 느끼지 못할 때쯤 저에게 찾아온 것은 우울함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왜 온건가? 매일 밥하려고 여기 왔는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지?

주부, 보호자, 백수, 내 인생, 나의 미래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외로움과 향수병이 동시에 엄습할 때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함의 나락으로 빠졌습니다.


우울에 빠져 나만의 동굴로 들어갈 때면 아이들도 덩달아 어두워지고, 남편도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저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우울해진 아내 때문에 모든 것을 접고 귀국을 해야 하나 라는 생각도 했다고 하네요.


내 고국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서 오롯이 육아하고 아내로 살아가는 것도 힘듭니다.

그런데 해외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것을 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아를 도와줄 가족이나, 키즈카페, 혹은 편한 외식/반찬 문화 등의 조금은 수월한 육아를 도와줄 고국 한국의 하드웨어적 도움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도전이고, 처음인 낯선 환경 앞에서 감당해내는 소프트웨어인 나의 정신적 고단함이 크거든요.


저처럼 우울에 빠지지도 마시고, 힘을 내시길.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본인이 그 상황을 어떤 각도로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180도 달라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행복하고 즐겁게, 알차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안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단단해지면서 성장하는 아내.

행복한 아내, 지금을 즐길 수 있는 아내,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 나가는 아내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혹자는 무슨 현모양처 뽑기 선발대회라도 나가시나요? 하면서 비아냥 거릴 수도 있습니다.

고루하게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아내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해외생활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자리에서

주재원 아내의 자리에서 저보다 수월하게, 지혜롭게 견디는 법에 대해 저의 생각을 적은 것뿐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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