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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Sep 27. 2021

이런 남편 또 없습니다

아몬드를 읽으며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나니 이제는 친구가 되어버린 게으름이라는 녀석이 다가오기 시작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절하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이면 놓칠세라 그 틈을 비집고 오는 참으로 부지런한 놈이다. 이 부지런한 녀석에게 처음엔 내가 이겼는데 그 후에는 자리를 내주고야 말았다.


그 녀석을 이겼던 어제 아침에 재빨리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과 이어폰 그리고 물 한 통을 챙겨서 산책에 나섰다. 이제 백신 맞은 팔도 괜찮아져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넓은 대학교를 관통하는 길에 무언가를 맛나게 먹느라 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청설모를 만났다.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어도, 동영상을 찍어도 꼼짝하지 않고 어찌나 자신의 먹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지, 고놈 참.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오니 냅따 내뺀다.

캠퍼스에서 만난 집중력이 대단한 청솔모

한참을 걸어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산이냐 호수냐 결정해야 했다. 호수로 정했다. 산은 이미 가 본 길이니까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일은 나를 설레게 하니까. 일요일 오전이라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나무와 숲의 향기를 듬뿍 느껴볼 만한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산에 가면 내가 하는 최고의 행위가 마스크를 벗고 숨을 쉬는 건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오고 가니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었다.


표지가 가르쳐 주는 대로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길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도로가 나왔다. 그런데 횡단보도 건너편을 보니 왠지 낯이 익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좋아하는 그곳이구나! 길이 이렇게 이어지는지 모른 채 새로운 산책길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곳이 나오자 괜히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그 동네 주민인 그녀가 떠올라 카톡을 보내었다. 일요일 오전에 딸 셋과 남편과 함께 바쁠 그녀가 카톡을 보지 못하고 답장을 늦게 보내어도 괜찮다, 라는 마음으로 보낸 건데 금세 답이 왔다. 평소에는 그녀도 나처럼 핸드폰 알람을 끄고 있는데 마침 핸드폰이 손에 있어서 내 카톡을 바로 보게 되었다고 했다.


잠시 시간이 된다며 모자를 쓴 그녀가 나왔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아주 멋진 도서관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아니면 전혀 알지 못했을 곳이었다. 커피를 마신 후 호수를 따라 함께 걸었다. 따가운 가을 햇살이 뒷 목을 불태우는 것만 같았지만 너무나도 청명하고 깨끗한 하늘에 우리는 감탄을 하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호숫가 산책로에는 각종 꽃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널따란 호수에는 처음 보는 작고 노란 꽃들이 커다란 수련 옆에 빽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참 맑은 하늘과 호수
수련옆에 있는 작은 노란색 꽃, 미니 수련인가?

미술을 전공한 그녀의 입에서 '수련'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모네가 생각났다. 모네의 정원에는 수련이 한가득이었는데... 관광객들이 사라진 요즈음에도 모네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답겠지? 순식간에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했고 그녀는 그곳에 대해서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치 사용설명서를 펼쳐 든 것처럼.


내가 충분히 이해를 하고 난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났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기다리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했다. 황금 같은 시간에 나를 위해 나와주었고 새로운 곳으로 안내를 해 준 그녀가 몹시 고마웠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그곳에 있는 책방에 갔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이미 대충은 봐 둔터였다. 이제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다. 다시 한번 책방에 꽂혀있는 책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예상을 하지 못하고 나온 터라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읽고 싶었는데 아직 읽지 않은 책중에서(대부분이 그런 책이지만) 짧은 소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을 돌고 나서 내 손에 잡힌 책은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였다.


하도 인기가 많아서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250페이지가 좀 넘으니 다 읽을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앉아서 읽으려다 배가 고파서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서 먹었다. 좀 전에 커피도 마셨겠다 샌드위치도 먹었겠다 이제 책만 읽으면 되었다. 집중력이 떨어질 때면 읽었던 곳을 다시 읽으며 계속 읽었다. 이래서 베스트셀러구나,라고 생각하며 몰입해서 읽던 중 끝자락 어느 부분에서 갑자기 내 머릿속에 남편이 나타났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 일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 기세가 너무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남편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 책에 나오는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과는 다. 작년, 내가 한국에 오기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장소는 시내에 있는 큰 은행 앞이었다.


그날 우리는 남편의 외화 통장 카드를 받기 위해서 은행에 갔었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우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는 데마다 줄을 서야 하는 쿠바에서는 한국처럼 나란히 줄을 서 있는 모습보다는 내 앞사람과 그 앞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후 여기저기에 앉거나 서서 질서 없이 기다리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울띠모(마지막, 마지막 사람)라고 하는 쿠바만의 줄 서기 문화이다. 이 줄서기에도 문제점은 있지만 그래도 더운 이 나라에서 나름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서기 방법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자 은행의 큰 문을 닫아버렸고 은행 직원이 나와서 사람들을 새로이 줄을 세운 뒤 신분증을 거두어갔다. 줄을 서는 과정에서 내가 네 앞이야, 아니야 내가 네 앞이야 하면서 한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아저씨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서운 은행 직원들이 와서 진정은 되었지만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편과 나는 제발 오늘은 남편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기를, 하면서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 머리가 하얀 영감님 한 분이 손에 봉지를 하나 들고 걸으시는데 제대로 걷지를 못하시고 비틀거리고 계셨다. 할일없이 은행 앞에서 자신의 차례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분을 향했다. 몹시 불안했으니까. 갑자기 그 영감님이 쿵 하고 넘어지셨다. 그것도 뒤로 넘어지시면서 시멘트에 머리가 곧바로 떨어지자 시멘트가 금세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아~~ 어떡해..." 순식간에 일어난 이 일에 너무 놀란 나와 일부 여성들은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런 소리 없이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남편이 그 영감님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와서 같이 좀 도와주세요!"


덩치가 커서 목소리도 우렁찬 남편이 소리를 질렀는데 남편과 함께 영감님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은 다른 아저씨 한 분뿐이었다. 남편은 몹시 흥분했다. 사람들이 백 명은 족히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이가 달랑 남편과 그 아저씨 두 분뿐이었으니. 잠시 후 몇 사람이 더 오긴 했다. 영감님을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남편이 뭐라 뭐라 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영감님을 다른 아저씨에게 맡기고는 은행 앞에 서서 그 장면을 쳐다만 보고 있는 여자 매니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보고만 있는 거요? 저 영감님을 빨리 병원으로 옮겨주시오. 빨리! 저기 은행 차 있잖아요."


진한 화장을 한 그 매니저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어딘가에 전화를 하는 흉내만 내었다. 은행 청원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남자 직원도 보기만 하고 귀찮은 듯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남편이 이성을 잃고 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너네가 인간이냐,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남편이 영감님을 구하느라 내팽개쳐버린 남편의  가방과 선글라스 그리고 좀 전에 내가 샀던 물건들을 챙겨서는 떨리는 심장을 잡고 한 구석에 서서 남편이 하는 걸 지켜보았다. 남편이 표효를 하는 도중에 다행히도 자전거 택시가 지나갔고 사람들이 그 택시에 아저씨를 태워서 병원에 모시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가 떠난 자리에 흔적이 낭자했다.


잠시 후 남편이 내 옆으로 왔고 사람들은 모두 남편에 대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내 남편인 걸 알게 된 아주머니들은 남편을 걱정하는 척하며 나에게 한 마디씩 해주었다. 이성을 잃었던 남편이 물을 머리에 뿌리며 열을 식히더니 잠시 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남편은 나에게 혼이 나기 시작했다.


"자기, 지금 자기가 한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동정을 살 수가 없어. 자기는 완전 이성을 잃어버렸어. 어떻게 가방이랑 모든 걸 내팽개치고 그럴 수가 있냐고! 내가 옆에 없었으면 자기 가방이랑 선글라스, 내 선물은 벌써 누가 가져가도 가져갔다고. 그리고 은행 직원한테 그러면 어떻게 해? 경찰이라도 왔으면 자기는 감옥에 가는 거야.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자기,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런데 사람이 죽고 있잖아. 사람이 죽는데 어떻게 아무도 안 도와줄 수가 있어? 이게 말이 돼? 그리고 은행 차는 국가 거니까 국민을 위한 거잖아. 은행 차가 저기 버젓이 있었는데 왜 은행 차로 저 영감님을 병원에 안 데려가냐고. 그걸 보니까 더 화가 났어."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라 모든 은행이 국가 소유이다. 그래서 남편이 은행 매니저에게 은행 차로 영감님을 병원에 보여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은행에서는 귀찮으니까 무시한 거였다. 피 흘리는 영감님을 태우고 나면 차 안에 남겨는 흔적은 누가 치우는지가 더 머리 아픈 문제였을 테니.(아마도)


이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도 남편은 말레꼰에서 바닷물에 뛰어든 한 아저씨를 살린 적이 있었다. 남편은 사람이 죽는 걸 가만히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건 알겠는데 두 번 다시 내가 없을 때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었다. 당신이 정의감에 불타서 행동하다가 감옥이라도 가면 할머니랑 어머니가 어떻게 사시냐고 했더니 알겠다며 두 번 다시 안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우리가 겪은 이 일들은 쿠바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연히 생긴 일이었고 그곳에 우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쿠바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세상 어디에서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몬드의 그 장면처럼.


나는 남편이 그렇게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건 처음 보았기에 너무 놀래서 남편에게 단속을 시킨 거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내 남편은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남편은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걸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키웠던 야옹이가 죽었을 때에도 그 새벽에 동네 공원에 가서 땅을 파고 고이 묻어주고는 야옹이의 영혼을 위해서 돌도 하나 얹어주었다. 남편의 종교에서 돌은 영생을 뜻한다고 했다.


야옹이에게도 그러는데 사람에게는 오죽하겠나! 내 속마음은 남편이 앞으로도 누군가가 위험에 처하거나 이번 일과 같은 상황을 보게 되면 도와주라고 하고 싶은데, 그게 인간의 도리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잡혀가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남편이 피해 볼까 봐 두려워서 두 번 다시 그러면 안 된다고, 절대 이성을 잃지 말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내가 속물처럼 여겨졌다. 나도 아몬드에 나오는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하지 않았던 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니까.


나의 야단에 기가 죽고는 미안하다고 하던 남편의 얼굴이 생생히 기억난다.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맑고 순수한 내 남편의 그 눈빛이 립다. 짐승처럼 포효했지만 그 마음은 누구보다 강한 인류애로 가득 찬 남편의 그 눈망울이 보고 싶어 아침부터 그리움에 젖어본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반쪽이어서 고맙다.






영감님이 병원에 가시고 한참이 지나 함께 병원에 가셨던 아주머니가 돌아오셨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은행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말씀하셨다.


"그 영감님 다행히 살았어. 내 이웃인데, 참 좋은 분인데 갑자기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네. 무슨 병이 있는 거 같아.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자네가 영감님을 살린 거야. 정말 고마워."


남편과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시고 아주머니는 사라지셨다. 남편도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남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영감님이 살았으니까. 남편에게 "자기 잘했어!"라고 말해주었고 남편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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