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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Oct 17. 2021

꽃으로도 때리지 않는 남자

남편이 바꾼 내 습관


정보가 공유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많아질수록 세상이 편해지고 사는 게 쉬워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만큼 한쪽에서는 소외받은 사람들과 열등감에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늘어간다. 모두 위로만 쳐다보고 아래는 보려 하지 않다 보니 점점 자신이 작아져 보이고 다른 이에 대한 동경이 증오로 변하기도 한다. 나에게 폭력성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다가 증오가 억눌려 쌓여있던 것이 어느 날 사소한 일 하나를 계기로 폭발해 버린다.


데이트 폭력도 그중 하나의 표현방법인 것 같다. 평소에는 잘해 주다가 여자 친구에게 무시를 당한다거나 이별을 통보받으면 그동안 쌓여있던 게 폭발하면서 그게 폭력으로 시작해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하는 가슴 아픈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갈수록 많아진다고 하니 남자를 만날 때 이 남자가 폭력성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 지 잠깐이라도 고민을 하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도 그랬다. 싱글일 때, 새로운 남자를 만날라고 치면 이 남자가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는지 정서적으로 안정된 건강한 사람인지 나에게 해코지는 안 할 사람인지 확인해 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그런 건 만나자마자 알 수는 없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는 거라 남자를 만나는 게 갈수록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모르면 괜찮은데 정보라는 걸 듣고 나면 편견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만약 남자가 나를 때린다면?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그냥 혼자 사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 많은 싱글 여성들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고 사고가 정상적인 남자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정상적인 사고 이외에 다른 조건들도 추가가 되었지만.


폭력이라는 건 한번 사용을 하면 계속 사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처음에 폭력적인 성향이 나왔을 때 두 번 다시 하지 못하게 싹둑 자르지 않으면 힘들어진다. 다행히도 나는 폭력적인 성향의 남자를 만난 적이 없지만 뉴스를 보면 데이트 폭력이 늘어난다고 한다. 요즘엔 여자에게 맞는 남자의 수도 증가한다고 하니 이건 비단 남자 여자의 문제라기보다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성향의 문제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수가 있겠다.






그러다가 이 남자를 만났다.

내가 지금까지 본 손 중에 가장 큰 손을 가진 이 남자는 그 손으로 앙증맞게 꽃반지를 만들어주고 바느질을 하고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냥 쓰다듬는 게 아니라 정성을 다해 살살 쓰다듬어 준다.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었고 할머니에게도 그랬고 아기에게도 그랬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고양이나 개에게도 똑같이 쓰다듬어주었다. 늘 한결같았다. 이 남자를 보면서 배우 김혜자 선생님이 쓰신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가 생각이 났다.


나는 리액션이 좋은 데다 웃음이 (아주)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랑 얘기하다 웃기기라도 하면 미친 듯이 웃으며 박수를 쳐댄다. 그러다 웃기는 강도가 세어지면 옆 사람을 마구 때린다. 그 사람이 싫어서 감정을 가지고 때리는 게 아니라 너무 웃기고 재미나서 온몸으로 표현하다 보니 그러는 것이었다. 그런데 간혹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같은 반응을 보이면 '얘가 왜 나를 때리지?' 하고 놀라는 표정으로 보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왜 때리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내가 재밌을 때 나오는 나의 습관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하고 넘어갔는데 예외가 있었다. 이 남자였다.


연애 초반에 웃기는 얘기를 하길래  내가 평소대로 손뼉 치며 막 웃다가 이 남자를 때렸는데 갑자기 이 남자가 정색을 하며 왜 때리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하며 심각하게 물어보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이 왜 맞아야 하는지 몰라서 놀란 것이었다. 그의 심각한 반응에 나도 놀래서 재밌을 때 나오는 습관이라고 했더니 그가 말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렇게 때리면 아프니까 앞으로는 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아프다고 때리지 말라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웃기다며 때리는 게 아플 수 있다는 걸. 어쩌면 이게 폭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끔찍해졌다. 그 전에도 가끔 아프다고 한 남자가 있었지만 이 남자만큼 심각하게 말하지 않았고 나도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그냥 넘어갔던 거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상황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나는 그의 반응에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아무리 웃기고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그를 때리지 않았다. 그냥 박수만 쳤다.


그 남자가 나의 습관을 바꾸어버렸다. 습관이라는 게 여차해서 바뀌는 게 아닌데, 그의 정색하는 모습에 그리고 간절히 부탁하는 진심 어린 마음에 놀라고 부끄러워서 한 번에 바꾸게 되었다.






몇 해 전 한국에서 아는 동생네 놀러 갔는데 동생 딸이 아직 첫돌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기는 처음으로 커다랗고 까만 거인 같은 남자를 보았고 놀래서 엄마품으로 가 버렸다. 그런데 한참 지나 내가 동생들이랑 얘기하며 노는 동안 아기가 이 남자에게로 가더니 품에 쏙 안기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동생은 자신의 딸은 낯선 사람 품에 안기지 않는데 왜 저러냐며 깜짝 놀랐고 우리는 아기 아빠 이제 어쩌냐며 깔깔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남자는 씩 웃고 있었다. 남자가 좋은지 아기는 계속 그의 품을 파고들었고 그는 커다란 손으로 아기를 품에 꼭 안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있었다.

아기는 저렇게 한참을 있었다

아기는 느낌으로 알았나 보다. 이 남자가 꽃으로도 때리지 않는 남자라는 걸.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이 남자를 만나서 배웠다. 내가 힘이 약한 여자라고 해서 웃기다는 명목으로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그리고 별 게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내 습관을 바꾼 남자가 내 사람이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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