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06월 19일
Instagram (3)
다시 태어난다면 내 핸드폰으로 태어나고 싶다.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 핸드폰은 하루 종일 조용하다. 가끔 핸드폰이 일할 때라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잔소리가 되어버린 코로나 재난 경보와 사람은 열 여명, 카톡방은 20개가 넘는 기형적인 우리 회사 카톡 방에서 오는 다양한 알림. 그리고 아침 알람이 전부다. 아! 가끔은 당근 마켓에서 청소기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게시물이 올라올 때에도 알람을 준다. 그 외에는 내 핸드폰은 하는 일 없이 띵가 논다. 내가 저렇게 태어났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일이 없는 상사 주인을 만난 덕분에 매일 노는 우리 핸드폰에 어느 날 낯선 알람이 울렸다. 인스타그램 DM이었다.
아주 가끔은 DM이 온다. ‘남편이 이 비밀의 약을 먹고 밤에 잠을 안 재운다’느니, 혹은 ‘주식이나 코인으로 인해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주체할 수 없는데, 그 놀라운 방법을 나한테만 특별히 알려준다’라던가 하는 흔해 빠진 광고성 메시지이다. 이번에도 그런 메시지인가 싶었다. 하지만 확인해보니 묘령의 아름다운 외국인 여성의 메시지였다. 내가 놀러 갔었을 때 찍은 사진을 캡처로 보여주면서, 혹시 여기가 어딘지 묻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온라인 상으로도 쉽게 마음을 여는 바쁘다 바빠 21세기 정보화 사회. 이처럼 궁금하면 바로 낯선 사람에게 연락할 수도 있구나… 이런 게 바로 외국 스타일인가? 나는 INFP 국가대표 소심이로써, 이렇게 DM으로 바로 연락하는 자세를 리스팩트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담아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 주었다. 심지어 그 근처 유명 칼국수 집은 가격만 비싸고 맛없다는 알아두면 언젠가 쓸모 있을지도 모를 정보도 알려주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분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며, 능숙하게 카톡 아이디를 물어보았고 카톡을 했다. 그리곤 그녀는 나에게 인스타로 봤는데 어디를 그리 많이 다녔는지 물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부터 자연스레 좌충우돌 콜롬비아 생활에, 그리고 지금은 이 시골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이야기를 나눴다. 거의 매일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에서 인스타로 대화를 시작해 국제결혼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혹시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더 친해져서 만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러다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그럼 한국에서도 결혼식을 하고 외국에서도 결혼식을 해야 하나? 싼티아고 말고 그 나라 이름을 새로 지어야 하나? 아기 이름도 한국어로 지을까 외국어로 지을까? 혼수로는 비스포크가 좋을까 lg 시그니쳐가 좋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멍청하고 어리석을 수 없었다.
며칠을 매일같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묘령의 여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알 수 있었는데,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홍콩 시민인 그녀는 홍콩에서 작은 규모의 호텔을 운영하는 중이라고 했다. 호텔 이름도 알려주어서 보았더니, 그 호텔은 홍콩 중심지에서는 조금 벗어났지만 무려 3성급의 깔끔한 호텔이었다. 그녀는 그 호텔의 대주주이기 때문에 주 1-2회 정도 호텔 운영 사항을 보고받고 지시하며, 그 외의 시간은 인생을 즐기며 논다고 했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뛰어난 사람. 이미 늦을 대로 늦은 타이밍이지만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대단하고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 왜 굳이 나랑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할까? 나의 알아듣기도 힘든 영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시간 내서 답장을 해주는 걸까? 그러고 보니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다.
먼저, 인스타 팔로워. 홍콩 시민, 홍콩 사람 치고 한국인 팔로워 수가 많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대부분이 한국 남자였다. 어째서 이 사람은 홍콩 친구보다 한국 사람 친구가 많은 걸까? 간혹, 한국 사람이 좋아서, Kpop에 열성적인 팬이라서 한국 사람이라면 친구 추가를 하고 보는 내 콜롬비아 친구들이랑 비슷한 걸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것 같은 티는 조금도 없었다.
둘째, 대화. 이상하게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었다. 첫날 했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도 기억을 못 하고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반응했다. 물론 나도 기억력이 나빠서, 금붕어와 용호상박 자강두천 하는 사람이라지만, 이 사람은 그 정도가 심했다. 가끔은 같은 ID이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셋째는 기승전 주식 이야기와 은근히 부를 과시하는 것. 무슨 이야기를 해도 끝은 최근에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 미국 농수산품 유통 가격을 공부한다던가, 틈만 나면 경제 신문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분명 매일 인생을 즐기며 띵가 논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사진을 가끔 보내줬는데 고급스러운 승용차나 호화로운 생활을 보여줬다. 뚜렷한 명품 로고를 은근슬쩍 보여주는 건 덤으로.
나의 의심이 꼬리의 꼬리를 물어 이런 대단한 사람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없다는 안타까운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와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검색해보았다. 한번 구글 검색에 블로그 글이 수십만 개 나왔다. 나랑 다들 비슷한 이야기였다. 아름다운 홍콩 여성이 인스타로 DM이 오고, 친해지고, 은근히 부를 과시하다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물어보면 자기만 알고 있는 초특급 고급 정보가 있으니 특정 홍콩 주식을 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집요하게 주식을 샀는지 인증까지 강요 아닌 부탁을 한다고 한다. (아주 지독한 녀석들이다.)
그렇다. 바로 주식 리딩 방 사기 같은 것이었다. 나는 주식 경력 10년, 그동안 상장폐지, 작전주, 대선 테마주 등등 온갖 주식시장의 흥망성쇠들을 당해본 사람이다. 바로 이 모든 스토리가 진부한 클리쉐 영화처럼 머릿속에 째깍째깍 재생되었다. 그 뒤 그 여성분은 즉결 차단 행이었고, 인스타 DM도 무시했다.
아마 나랑 비슷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그런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글을 남긴다. 우리들은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1.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
2. 그런 일이 일어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1. 을 다시 유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