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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호성 Dec 25. 2021

가사 없는 음악이 더 좋아졌어

B와 D사이의 C에 관하여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대중음악을 좋아했다. 대중음악은 대개 작사와 작곡이 함께 이루어져 청취자가 느끼는 감상의 수준을 극도로 고취시킨다.  역시 장르를 불문한 여러 가지 형태의 대중음악을 들으면서 가사의 의미를 되뇌어 보기도 하고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가사 없는 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 플레이리스트는 한때 화려한 대중 아티스트들의 앨범으로 가득 찼었지만 지금은 그리 대중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클래식 음악이나 연주곡들로 가득 차 있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밴드 보컬까지 했던 나에게 이러한 변화는 생경하다.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고 싶다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을 때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대부분 아티스트의 입에서 나오는 가사에 의존하게 된다. 그 가사가 주는 의미와 특유의 멜로디가 섞여 나의 오랜 서랍에 고이 묵혀 두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노래라면 응당 해야 하는 역할이고 좋은 노래일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기억 속 존재하는 감정의 골로 깊게 빠져들게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싫증이 난다. 아티스트가 제시한 틀을 벗어나고 싶다. 아티스트의 입 너머로 전달되는 가사에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멜로디가 슬프더라도 기쁨을 느끼고 싶고 힘찬 멜로디 속에서 무언의 아픔을 느끼고 싶다. 미술로 치면 호안 미로나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표현방식이 좋아졌다는 말일까.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그런 것들 말이다.

Constellation. Ciphers and Constellations in Love with a Woman, Joan Miró, 1941

 우리들은 때때로, 아니, 거의 항상 인생에 답이 정해져 있다고 착각한다. 마치 살면서 올라야만 하는 일종의 계단이 존재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어떤 일들을 해야 하고 그때가 되면 반드시 그것들을 해내야만 한다고 우리의 머릿속에 '스스로' 무언의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의 사회는 이런 ‘답정너’ 개인들이 오랜 기간 합의해 내린 공동의 창작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인생 중 6년의 초등교육과 3년의 중등 교육과정을 거친다. 의무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3년의 고등교육과 4년의 대학교육을 자발적으로(과연 자발적일까) 받는다.           


 그렇게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모르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성인이 된다. 20대 초반, 인생에서 가장 빛날 시기.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생기 넘치고 밝으며 아름다울 시기. 이 시기에 다다른 약 80%의 청춘들은 대학 진학을 선택한다.


‘왜?’라고 물으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할지가 궁금하다.


 학문에 뜻을 두고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한 소수의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냥 다들 가니까’ 혹은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취업을 하니까’ 둘 중에 하나로 답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에 우리가 내린 선택은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군중심리 혹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학교를 졸업해야 뭘 하던지 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 말이다.


 그렇게 해서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면 우리의 빛나는 대학교 신입생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선후배 관계를 닦기 위해 신입생 새내기 배움터(술 교육을 위한) 혹은 오리엔테이션이라고 불리는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에게는 대학교 진학의 본질인 학업보다 술자리가 더 중요한 듯하다. 신입생들은 거의 매일 혹은 매주 술을 마신다.


 ‘왜?’라고 물으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할지가 또 궁금하다.


 술이 정말 좋아서 매일 마신다는 소수의 알코홀릭 꿈나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렇게 답할 것이다. ‘대학교 신입생은 다들 술을 마시니까.’ ‘학과 생활에서 인싸가 되려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니까.’


 그렇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우리는 군중심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군중심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해야 한다. 그게 진리이자 인생의 정답인 것이다. 대학 진학이라는 큰 선택부터 술을 마시는 사소한 행위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20대 초반을 허비하다 보면 남자의 경우 피할 수 없이 군대를 가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자발적’ 선택이 다가온 것이다! 국가는 당신을 필요로 한다.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정말 없다. 그래서 머리를 짧게 깎고 이등병의 편지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검색하여 들어본다. 그렇게 눈떠보면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한 좁은 생활관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보고 싶다.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고 친구들과 여자 친구가 보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군대 선임들 뿐이다. 말 그대로 너무 못생기고 험상궂은, 나를 먼지만도 못한 취급하는 무례한 놈들 말이다.


 그렇게 또 약 2년의 기간을 '삽질'하며 보낸다. 여기서 삽질은 중의적이다. 전역하면 20대 중반에 다다르게 된다. 분명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해서 불렀다고 했는데 내가 국가를 위해 뭘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되려, 국가가 나에게 쥐꼬리 만한 월급을 주며 부정적인 무언의 심리적 폭력을 행사해준 거 같은 느낌이 든다. 20대 초반, 가장 빛나는 시기의 2년이 그렇게 지나간다.


 그들에게 ‘왜’ 군대를 가냐고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대한민국의 남자니까.’ ‘다들 군대에 가잖아요, 어쩌겠어요’ 이렇게 또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시간을 허비한다.


 대학교에 복학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면 얼추 3학년이다. 신입생 때 못했던 학점관리와 온갖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시간. 끼가 좀 있다면 연애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그렇게 20대 중반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목표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직업 :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여기서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직업의 정의에 있는 자신의 ‘적성’과 ‘능력’이 무엇인지 당최 모르겠다. 내가 뭘 잘하는지 내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나름대로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여태까지는 이런 고민 없이 답이 정해져 있었는데 말이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크게 당황한 대부분의 취업준비생들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린다.


"에잇! 그건 모르겠고 스펙이나 쌓자"


 이 정도 ‘스펙’이면 좋은 데 가겠지!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온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대한 고민 없이 온갖 불필요한 공부들과 자격증, 대외활동을 해내는데 집중한다. 본인 스스로 전자기기의 성능을 표기하는데나 쓰이는 항목인 'specification'이 자신을 정의하는 표기 항목이 되기를 선택한다.


 여기에서 무서운 것은 그들은 생각보다 진지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진정성은 지금까지 군중심리에 따라 ‘비자발적’ 의사결정을 내려온 그들이 처음으로 보여주는 ‘자발적’ 선택에 뿌리를 둔다. 지금 그들은 진지하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자발성’ 역시 100% 군중심리로 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들은 잘못된 방향성을 설정한 뒤 맹목적으로 그 길을 걷는다.


‘왜’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취업하려면 다들 그렇게 하니까요.’ ‘스펙이라도 좋아야 면접 볼 기회가 생기지 않겠어요?’


 대학 진학과 취업의 가장 큰 차이는 지원자 선발 방식에 있다. 대학 진학은 지원자들을 하나의 공통 기준으로 서열화시킨 뒤 (학업능력) 높은 순서대로 합격증을 내어준다. 그러나 기업은 하나의 공통 기준으로 지원자들을 선발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를 본다는 말이다. 기업에 들어와서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가리는 조직적합성은 면접으로, 기본적인 수준의 창의성이나 논리, 수리 능력을 갖춘 사람인지는 적성 검사로, 인생에 대한 가치관은 자기소개서로 본다. 스펙으로 나래비를 세워 높은 순서대로 사람을 채용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취업준비생들은 자신의 학벌, 학점, 수상 내역 등 스펙이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맹신한다. 높은 연봉의 직장에 들어가는 게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다른 말로 취업에 성공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별다른 차별성 없이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말은 그냥 지원이나 한번 해보지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소수가 되기 위해서는 군중 사이에 들어가면 안 된다.


 달라지고 싶다면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평생을 답이 있는 것처럼 비자발적으로 살아온 우리들에게 이런 깨달음은 절대로 쉽게 다가오지도 공감되지도 않는다. 스스로 온전히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 본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인생을 산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은 B와 D 사이 C다. 프랑스의 사상가 사르트르의 말이다. 우리의 삶은 Birth (탄생)과 Death(죽음) 사이 우리가 내리는 C(choice)에 의해 결정된다. 안타깝게도 많은 대한민국의 청년들의 C는 너무나도 평준화되어 있다.  


 왜 하나뿐인 인생을 남들과 동일하게 살려하는가?
 왜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입시킨 선택의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가?


 ‘국룰’이라는 말이 있다. ‘국민 룰’의 줄임말로서 특정 행위가 불문율이라는 뜻이다. 소개팅 후 세 번 만남을 가지면 고백을 해야 한다는 룰, 술을 마신 뒤에는 순댓국으로 해장을 해야 한다는 룰, 다리가 길게 나오기 위해 사진을 찍을 때 적용해야 하는 카메라 앵글의 룰 등… 이쯤 되면 모든 것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또 이런 것들을 자발적으로 따를 것인가? 비자발적 인생을 맹목적으로 살아온 청년들이여, 소개팅 후 몇 번째에 고백하고 무슨 음식으로 해장하고 어떻게 사진을 찍는지 까지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할 것인가? 이제는 어떤 가이드라인에 '왜?'라고 반문하는 습관을 가졌으면 한다.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제안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시키는 폭력에 버금가는 무례한 행위다.


 설령 그 국룰이 시행착오를 거쳐 일반적인 대중들에게 평균 이상의 만족감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인간은 타인이 아닌 본인 선택에 의한 결과물에 더 만족하는 법이다. 점심메뉴를 선택할 때도, 주말 계획을 세울 때에도 제발 본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내린 결정이기를 바란다.  


 비자발적인 선택은 대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내린 선택이 아닌 남들이 제안한 선택에 깊은 고민 없이 동조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이들에게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스스로 새장 안에 갇혀버린 새가 되기를 자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말했다,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인생에 해답은 없다.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인생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시기를 인생에 해답이 있는 것처럼 산다. 30년에 가까운 인생을, 가장 빛나는 인생의 시기를 ‘국룰’에 동조하여 비자발적으로 살아간다. 너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것이 20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내가 내 1/3의 인생을 돌아보며 느끼는 감정이다. 나 역시 국룰에 지배당하며 내 청춘을 보냈다. 남 다를 것 없이 평범한 학생이자 군인이었고 지금 역시 평범한 회사원이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디고 난 후로부터 정말이지 인생에 해답이 없다는 것을 체감한다. 직업을 가지고 난 뒤에는 그다음 스텝이 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라는 스텝이, 전역 후에는 취업준비라는 스텝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스텝이 사라졌다. ‘당연히’ 향해야 하는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금세 퇴근 시간이 되어 버린다. 분명 월요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금요일이 되어버리는 일상이 반복된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한 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더라.    


 방황의 시간이 반복된다. 다음 목표가 사라지니 이대로 일만 하다가 죽겠다 싶다. 극도로 무기력 해지는 일상이 반복된다. 약속 없는 주말엔 아침에 눈을 떠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하고 싶지가 않다. 그냥 잠을 자고 싶다.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생길 때까지 말이다.


 물론 인생에 남은 몇 가지 국룰이 있지. 몇 년 사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차를 사서 날씨 좋은 주말이면 가끔 드라이브도 가고 정신없이 아이를 키우겠지. 그렇게 바삐 지내다 보면 또 한 해, 두 해가 가고 승진을 하고 연봉이 오르고 사고 싶은 물건들을 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오랜만이라며 술잔을 기울이고 가끔 해외여행을 다니고 호텔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겠지…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가 너무 예측 가능하다. 지금까지 예측 가능하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너무 투명한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국룰이 주는 폐해다. 사람의 인생을 너무 뻔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느덧 30살이 되어버린 지금 이제부터는 국룰에 지배당하지 않고 온전히 내가 내린 선택에 의해 내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어떤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될지
 어떤 이들을 만나게 될지
 앞으로 어떤 커리어를 새롭게 쌓아나가게 될지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는가? 국룰에 의하면 저 세 가지에 이미 답은 다 정해져 있을 테다. 그러나 앞으로의 내 삶의 주인은 온전히 내가 되고 싶다. 30년을 사회의 뜻대로 살았으니 남은 인생은 한 번쯤 내 뜻대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내 삶에 대한 선택을 스스로 내리며 산다면 그 무엇도 뻔하지 않을 테다.


 그래서 난 이제 가사 없는 음악이 좋은 것이다. 아름다운 선율에 내가 넣고 싶은 감정을 넣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들을 수 있으니까. 이별 후에 듣는 뻔한 발라드나 크리스마스에 듣는 시즌성 캐럴이 아니고 말이다.

 오해는 없길, 난 모든 종류의 음악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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