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호성 Mar 30. 2022

행복에 관하여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직장 선배가 오랜 연애 끝에 곧 결혼을 한다. 출근 시간 직원들로 꽉 찬 엘리베이터에서 직원들이 묻는다.

“과장님 행복하시겠어요~?”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제 각기 마실 술을 시키고서 둘러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는 이직을 했고 누구는 새롭게 연애를 시작했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그래서 행복하냐?”


 행복주택, 국민행복카드, 행복을 찾아서, 소확행… 인터넷 검색창에 ‘행복’만 쳐봐도 행복을 어원으로 한 무수히 많은 단어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행복’은 참 중요한 듯싶다.


 그런데 나는 과연 이 ‘행복’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살아왔나?  ‘나는 언제 진정으로 행복했던가? 불안도 외로움도 없이, 성취도 자부심도 없이, 기쁨으로만 기뻤던 때가 있었던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엄마가 사준 배스킨라빈스 민트 초코칩을 난생처음 먹었던 순간, 군대를 전역하고 의무 복무의 짐을 벗어던진 순간, 좋아했던 여자를 만나 맘껏 연애했던 순간,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고는 내 마음을 그곳에 두고 온 순간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이 정도면 행복한 순간이 많다고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순간들만큼은 내 인생에서 정말이지 한 치 거짓 없이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여기까지는 모두 30대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직장을 얻고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업무를 하면서 보내는 나날들이 길어질수록 진심으로 기뻤던 순간들이 내 인생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을 느낀다.


 마음의 방황이 시작됐다. 행복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니 점점 더 행복에 집착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건지,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인지, 내가 너무 부정적이라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주변에 내 또래들은 행복한지, 도대체 이 넓은 세상 속에서 행복한 감정 하나 느끼기가 이렇게 어려운 게 정상인 건지.. 나도 모르는 새 행복에 굶주린 가난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득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복을 묻는 이유가 바로 본인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행복이라는 당최 채워지지 않는 이 느낌을 어렴풋이라도 타인을 통해 느껴보고 싶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나도 나 자신과 친구들에게 행복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스트레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커피로 하루를 연명하며 버티고 버틴 하루들.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 나의 노동과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들.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불을 켠 순간 세상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 이런 것들은 행복의 순간들 과는 반대로 나를 조금씩 반복되는 불행의 굴레에 던져 버렸다.


 나름대로 많이 고민해봤다. 가난한 마음은 물질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돈이나 소유를 행복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템플스테이를 신청해서 혼자서 명상을 했다. 공기 좋은 산속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마음이 정화될까 싶었다. 많은 책들을 읽었고 좋은 영화들을 보고 훌쩍 여행을 떠났으며 좋은 대화를 나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나의 경우에는 모든 종류의 소셜 미디어와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술이었다)을 줄여 나갔다. 시간을 들여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했다. 친구들을 주기적으로 만나 외롭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전히 행복해지지 않았다. 긍정적인 노력들은 나의 기분을 환기시킬 수는 있어도 나를 근원적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지는 못하더라.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없다는 것을 느끼면 좌절감이 엄습한다. 평생 불행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아찔한 생각도 들었다. 우울했다. 실제로 우울한 감정이 오랜 시간 지속됐다. 불행함을 느끼는  레를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지난  년간 간절하게 들었다.


 그런 나날들을 한 해, 두 해 나면서 나는 일종의 포기를 선택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니 슬픈 얘기지만 그 노력을 놓아버린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것에, 커피로 하루를 연명하는 하루에, 이따금씩 드는 후회스러운 나의 지난날들에 ‘그럴 수 있지, 원래 그런 거야’라는 주문을 외우며 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했던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예전만큼 행복이라는 느낌을 얻기 위해 안절부절못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빈도가 줄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때때로 작지만 행복한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내가 불행했던 이유는 바로 행복하지 않은 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한 오만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 탓에 나는 삶이 주는 가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행복에 너무나도 집착한 나머지 일상에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기회들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껏 내가 겪어온 행복보다 더 큰 행복만이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것이라는 착각도 한몫했다.


 진정으로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에 바깥을 찾아 헤맸다. 나의 오만함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세상 탓을 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재밌는 것이 없냐며 투덜댔다. 정당한 이유 없이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이런 내면을 가진 나에게는 제 아무리 좋은 그 무엇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한정원, 시와 산책)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불행이 아니다. 그리고 꼭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행복은 집착할수록 우리 손에서 멀어진다. 그저 하루를 온 마음을 다해 살아내다 보면 이따금씩 행복한 순간이 저절로 찾아온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기대가 없으니 찾아와 주는 것으로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행복은 잊으려 할수록 되려 우리를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다짐해본다.

비록 행복하지 않아도 정성껏 살자고.

행복이 찾아올 때 두 팔을 벌려 마음껏 환영하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