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는 우려낼수록 그 맛과 향이 옅어지기 마련이지만 몇 번이나 우려내도 더욱 진해지는 것이 있다. 내게는 언젠가의 슬픔이 그랬다. 영화 박하사탕을 거듭해 봤던 이천십구년 오월을 건너 유월을 지나는 철이었다. 슬픔이 이어져간 날들은 길을 걷다 마주하는 것들에 서글퍼졌다. 애써봐도 열리지 않는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바라보며 이 존재에 애처로움을 느꼈다. 한밤중 욕실 안, 김 서린 거울을 닦아내고 마주하는 나의 모습은 거울 속 자신에게 손가락으로 욕하는 영호[1] 로도 보였다.
해장국을 사 먹었다. 국물까지 전부 비우고 일어났다. 계산대에서 신용카드를 건넸고 영수증이 나오는 동안 여러 손자국이 얼룩져 있는 투명한 통 속 박하사탕에 눈이 갔다. 끝이 뾰족한 마름모꼴 박하사탕. 통에 제각각 묻어있는 손자국에 망설여졌지만 진한 국물이 배어든 입속을 개운하게 가시어 내고 싶어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박하사탕 특유의 향이 입안에서 퍼져간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돌아오는 길 입속을 돌아다니던 박하사탕은 전부 사라졌다. 숨을 들이켜면, 누그러져 가는 겨울바람 끝에 살그머니 묻어난 초봄 바람 같은 박하사탕 향이 불었다. 그 향은 먼지 쌓인 지난 일들 속에서 같은 내음 스며있는 기억을 불러왔다.
대학 마지막 학기에 수강한 교양과목 문학과 영화 시간이었다. 영화 박하사탕 관람 후에 교수가 강의실 앞쪽에 앉아 있던 내게 물었다.
“어땠어요?”
그 당시 내 대답은 “피곤한 삶인 것 같아요.” 였다.
영화가 막 끝나고 받은 질문이었기에 가감 없는 답변이었지만 가끔 나는 공상한다. 같은 질문을 받는 오래전 그 강의실 속 나를. 그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이번에 할 말이 제법 많다.
천구백팔십년 오월. 영호에게 있었던 일. 허락 없이 국가가 된 자(者[2])들의 명령을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 총에 맞은 자도 총을 쏜 자도 모두 시대의 희생자들이 아닐까 싶다. 총알은 살을 헤집고 뼈를 부수어 총에 맞은 자들이 살아갈 삶을 두고 떠나가게 했다. 삶을 거두어간 총알은 되돌아와 쏜 자들의 넋 깊이 박혀, 살아가는 삶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영호가 했던 한 번의 일이 그에게서 무언가를 상실시켰다. 영호의 내부에서 다시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사라진 것만 같다. 그것을 잃고 나자, 영호에게 다른 것이 생겼다. 그것의 상실로 발현되어 버린 것. 이를테면 일을 치러 나가는 수완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힘에 겨워하는 일들을 모질게 해나갔다. 그렇게 영호는 그가 사는 세상에서 받아들여져 갔다. 첫 번째 도미노가 넘어지고 손 쓸 틈 없이 다음 도미노들이 쓰러져가듯 그날 한 번의 일이 영호를 주저앉혔고 삶을 무너트려 갔다. 거부할 수 없는 손에 등 떠밀린 채 살아가는 영호의 얼굴은 어딘가 성나있었고 초점 없는 눈 너머에서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의식을 더듬는 것 같다. 영호가 무너져가는 날들은 그 시대 수많은 영호들의 모습이었을 것만 같다.
영화는 기차로 시작해서 기차로 끝났다. 과거로 가는 기차는 시간을 거슬러 거꾸로 달렸다. 기차 주변의 차도 거꾸로 가고 새도 거꾸로 날았다. 무엇의 상실이 영호를 무너트려 갔는지 시간의 역순으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던 나는 무척이나 피로해졌다. 영호는 혼란스러워질 때면 다리를 절었다. 영호 안의 상실은 다리를 절게했고 그 다리로 삶을 절어갔다. 그 시간에 매번 기차가 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경적을 울리며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 위에 서서 절규하던 영호는 돌아갔을까. 어디로 누구에게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그 처음은 박하사탕 같은 새-하얀 순수이지 않았을까.
기차역에 끝없이 놓인 철길을 보면 영호가 떠오른다. 기차에 몸을 실었던 유월, 창밖 하행선 철길에 핀 민들레꽃 한 뿌리를 봤다. 덜컹거리는 육중한 쇳덩어리에 스쳐 가며 흔들리는 꽃이었다. 퍼져버린 민들레 홀씨가 앉은 곳에 한 번 뿌리내려 옮기지 못하고 기차가 일으킨 바람에 흔들리며 그곳에서 온몸으로 기차에 치여 가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 영호와 닮아있었다.
누군가가 겪는 산통 같은 아픔들이 좀 더 나은 시대를 낳을 때가 있다. 괜찮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만 같은 지금이 많은 사람의 아픔을 거쳐 마주한 순간이라면 우리가 겪는 아픔도 다음 사람들이 만날 시간의 전주가 될 텐데 그 전주가 영 슬프지만은 않았으면 한다.
차(茶)는 우려낼수록 그 맛과 향이 옅어지기 마련이지만 영화 박하사탕은 우려낼수록 진해지는 슬픔이 담긴 차가 되어 가슴에 사무치듯 배어든다. 매일 같은 차를 마시는 빈 찻잔에 그 향이 옅게나마 배어 있다. 슬픔이 우러난 차를 전부 비워낸다고 해도 찻잔의 향까지 비워질까 싶다. 녹아 없어져도 입안에 남아있는 박하사탕 향처럼.
[1]영화 박하사탕 등장인물
[2]놈 자, 사람 자. 여기에서는 놈 자로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