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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Oct 27. 2024

걸음을 멎게 한 물음




  대전역 4번 트랙 가장 끝 플랫폼에 서 있었다. 제값을 지급하고도 고속열차 티켓에 표기된 차량 번호와 좌석 위치에 관계없이 열차의 마지막 호차, 승객으로서 갈 수 있는 가장 끝 칸에 탑승해 서서 간다. 자주 그러곤 했다. 어차피 한 시간 남짓만 가면 서울역에서 내리기 때문에 지정된 좌석에서 모르는 사람과 닿아가는 팔을 신경 쓰며 엉덩이에 좀이 쑤시게 앉아 있을 바에는 오히려 일어나 가는 게 편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속열차 차량 끄트머리에 나 있는 문이 열리고 계단을 두어 개 오르면 공간이 있다. 승객들은 지정 좌석에 앉아 앞을 보고 있느라 그곳으로 오르내리는 누군가를 보지 않는다. 내가 열차에 올랐을 때 바닥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는 군인만이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빠른 이동 수단에 탑승해 직접 갈 수 있는 가장 뒷자리로 가서 서 있는 게 이동시간에 합리적이지 못 한 일 같기도 했다.


   

  문에 나 있는 작은 창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좋았다.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면 어느 날이든 온전히 그 계절의 정취를 누릴 수 있었다. 철로는 산과 들을 지났다. 논과 밭을 지나 물 위를 건넜다. 사람을 가득 실은 기차는 사람이 없는 곳을 지난다. 사람이 없는 곳에 자연이, 그 안에 계절이 고스란히 앉아 있다. 선택적 입석으로 가는 건 좌석과 다른 면이 있다. 크기가 다른 창을 바라보는 것이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큰 창으로 넓게 멀리까지 보는 일과 흔들리는 기차에 기대어 작은 창으로 좁고 가깝게 보는 일이 그렇다.  



  아마도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 초입 어느 역이었겠지 싶다. 타고 있는 열차의 속도가 줄어가며 완행하기 시작했다. 건너편의 하행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보였다. 그 역에는 정차하지 않고 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여름 철도역에 아우러지는 풍경이었다. 이어진 장맛비로 끼어있는 불순물이 말끔히 씻겨 내려간 대기에 유월 말 여름 정오 햇살은 한 줄기도 걸리지 않고 닿을 수 있는 데까지 뻗어 내렸다. 바라보고 있는 작은 창으로 한 포기 꽃이 눈에 들었다. 장맛비를 머금고 날씨만큼 노란빛을 발하는 민들레였다. 철로의 궤도 바깥쪽에 곧바로 달라붙어 자라나 있었다. 서행하는 기차에 서서 간 덕에 본 풍경이었다. 달리는 기차에 민들레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민들레는 뒤따라오는 차량에 치였다. 줄줄이 이어져 있는 차량에 흔들리고 치이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날 다음날 그다음 날에도 그곳을 지나는 기차마다 그럴 터였다. 세상 넓디넓은 곳, 많고 많은 곳을 두고 왜 그곳에서 피어 있을까. 언젠가 어느 바람은 왜 기차가 지나는 길 바로 옆 돌 틈에 민들레 홀씨를 앉혀놓았을까. 문뜩 ‘영호’가 생각났다.  



  영호[1]와 닮아있었다. 한 번 뿌리내려 오도 가도 못한 채 하루에도 여러 번 기차에 치이며 살아가는 모습이, 거부할 수 없는 손에 등 떠밀려 살아온 영호가 떠올랐다. 어떤 존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삶. 눈에서 멀어지는 꽃 한 포기가 시들어 죽기까지 그리 살아야 하는 삶이 가여웠다. 서울역에 도착한 열차의 문이 열렸다. 올라왔던 계단을 밟고 기차에서 내렸다. 이 역의 마지막 플랫폼이다. 역사 쪽으로 걸었다. 가장 끝 칸에서 내려 플랫폼을 빠져나가려 몹시 긴 차량 옆을 지나가는 일도 한참이었다. 앞선 칸에서 하차한 승객들로 다소 분잡했다. 비어 있는 철로 주위에 민들레와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꽃들을 보며 느려지던 걸음은 멈추어 갔다. 앞서 걷던 붐비는 승객들로 인해 걸음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꽃들이 물어오는 것만 같은 물음에 물려버린 걸음은 멎어버렸다. 

‘만약 사람이 기차에 치이었다면 죽거나 크게 다쳤을 텐데 하루 한 달 몇십 번을 그 자리에서 온몸으로 기차를 받아내는 민들레가, 그 돌밭에서 피어난 꽃 한 포기를 감히 인간보다 약하다고 인간이 한 포기 꽃보다 강하다고 여기는가.’



  철로 바로 옆에 피어나 기차에 치이는 민들레의 삶에 느낀 나의 연민은 다른 이의 안타까운 처지를 보며 저지른 위안이었을까. 나의 나약함도 모른 체 섣불리 나 아닌 존재의 삶을 불행으로 여긴 교만이었을까. 기차를 타고 먼 지역을 민들레 홀씨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위협에 잽싸게 몸을 피하지만 깊이 박혀버린 강박적인 생각들로 행동거지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내가 철길 옆에 뿌리내린 민들레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기차에 치여 꺾여버려도 다음 날이면 다시 곧추서고 그곳에 앉아 있을 민들레를 생각하면 측은한 건 오히려 나였다. 


      

[1]영화 박하사탕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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