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가 생각났다. 아마 교고 문학 수업에서였을 것이다. 교실과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나이키 운동화, 그밖에 학교에서의 일에 큰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잊히지 않는 시 한 편이 있다는 건 언젠가 이 시가 필요해질 나에게 희미하게나마 새겨진 문장들이 있었을 거라는 필연을 느끼게 한다. 자신에게 든 병을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자네라 부르며 다정하게 친구라고 하는 시. 조지훈의 ‘병에게’였다.
#1
열다섯의 내가 무엇에 그리 답답해서 하루 대부분 한숨을 쉬었는지 한여름에도 손발이 차가웠는지 아침마다 배앓이에 시달렸는지 왜 그리도 날이 서 있었는지 이제 알 것만 같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게 병이란걸 알았을 때 내가 병에 걸려버린 것을 알았을 때 나를 오해했던 시간이 이해되었다. 병을 받아들이니 병자가 됐다. 세상이 갑과 을로 시끄러울 때 들여다봐 주는 이 하나 없는 병자. 내 안에 병이 있는데 내가 병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이 병에서 나올 수 있을까. 이 병에서 나을 수 있을까. 나를 다그치고 몰아붙이며 흘렸던 눈물들 모아가면 병 밖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 도저히 바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비틀거려 병이 쓰러져 깨져버리면 그제야 나올 수 있을까.
#2
육둘하나 야전포병 대대장은 중령 계급에도 대부분 우리와 함께 작업을 했다. 지시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대대장 밑으로 누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창고 뒤에 새로 계단을 놓는 작업을 하면서 흙을 파낸 땅에서 이 부대가 창설되었을 때 묻었을 것만 같은 쓰레기가 나왔다. “꺼내 놓으면 쓰레기 묻어놓으면 거름.” 대대장이 말했다. 분대장 수첩을 꺼내 그 말을 적었다. 문득 이 병이 나의 재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예술가들도 이런 병 하나씩은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꽤 그럴싸한 생각이다. 신이 재능을 빌려준 예술가들도 재능만 받지 않았을 터. 이겨내지 못하면 신은 그 능력을 거두어간다고 한다. 못 버텨내면 나는 강박증 환자. 버텨내면 신의 가호. 집착을 넘어 강박으로 확인하고 끝을 내 눈으로 봐야 일을 끝내는 건, 그럼에도 잘 못 본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또다시 한번 전부 뒤집어 까보는 건 병인가 재능인가. 눈을 뜬 순간부터 시작되는 수많은 물음과 확인 그 확인을 뒤집는 질문과 내 안의 다른 나에게 겨우 타협해서 찾아낸 답변. 이 과정의 무한한 반복은 병인가 재능인가. 병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재능이라 여기고 ‘써’봐야겠다. 묻어놓으면 거름이 되는 쓰레기처럼. 내 안에 묻어두어 숙성해 속 뒤집어지는 날 성숙한 무언가를 꺼내놓고 싶다. 내 안에서 종이 위로.
#3
잠에서 깨어버렸다. 놀라서 눈이 번쩍 떠졌다. 심장이 팍-팍-팍-팍- 세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거실을 지나 있는 엄마 방인 것 같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엄마 방으로 갔다. 조심히 문을 열어 봤지만 빛도 소리도 없었다. 다시 소리가 들렸다. 천정에서 내려오는 소리였다. 새벽 두 시를 넘어가는 시각에 건넛방까지 들려오는 크기의 텔레비전 소리였다. 날이 밝고 십일 층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다시 한번 눌렀다. 문 너머로 사람의 기척이 들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초인종을 잇달아 되풀이하여 누르고 문을 두들겼다. 그제야 문이 열렸다. 엄마보다 좀 더 연배가 드신 아주머니였다. 지난밤 일을 말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게 만들었다. “내가 항암치료를 받고 있어서 소리가 잘 안 들려 좀 줄이고 볼게…” 나는 안녕히 계세요. 건강하세요, 라는 말을 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사과를 받은 건 나였지만 도리어 송구한 것도 나였다. 며칠 뒤 십일 층 아주머니가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에서 나누는 아주머니와 엄마의 대화를 들었다. 아주머니가 입원했을 당시 병원 담당 의사는 아주머니가 다시 집으로 못 돌아갈 거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담담하게 “병이랑 같이 사는 거지… 놀아야지… 노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십일 층으로 올라갔다. 그 뒤로 한밤중 텔레비전 소리는 가끔 우리 집으로 내려오곤 한다. 더는 아주머니가 병과 노는 소리는 나에게 시끄럽지 않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시는 것 같다. 그 소리가 마냥 즐겁게만 들리지 않는다.
#4
삶을 살아가며 나의 의지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일들이 벌어져 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쩔 수 없는 일들에 초연해져 간다. 몇 해 전 내가 극복해 내고 도려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겼던 강박증을 불편한 친구로 받아들였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부터 세상에 나온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인연이 만들어낸 필연으로 여겨본다. 때론 새벽에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울컥- 눈물도 터지지만 아침을 먹고 우울증 환자보다 많은 양의 항우울제를 목으로 넘기지만 나는 이 불편한 친구와 가장 덜 불편한 방식을 찾아 같이 살아가기로 했다. 나에게 매달려 다니던 이 친구를 내가 업어 버렸다.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 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조지훈, 병에게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