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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Oct 27. 2024

개와 늑대의 시간



 

  블랙셔츠가 입고 싶어졌다. 파리 생재르맹 경기를 기다리는 새벽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상의를 탈의한 채 서성거리던 나는 전신거울 속에서 스탠드 등 빛이 살에 물든 벌건 나를 마주했다. 별안간 검정 셔츠가 생각난 건 얼마 전에 백화점을 나오면서 엠포리오 아르마니 진열대를 본 탓이었다. 당시에 디스플레이 행거에 걸린 옷걸이를 일일이 검지로 넘기며 옷가지를 볼 여유가 없었다. 그 후로 나는 그곳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검은색 아르마니 셔츠가 가지고 싶어졌다.  



  오래된 블랙셔츠가 있었다. 버린 기억도 버릴 리도 없을 셔츠였다. 옷장 앞까지 잰걸음으로 갔다. 붙박이장 문을 열어 검은색으로 구분 되어 진 부분에서 한 덩어리의 어둠 같은 옷들을 일일이 만져보며 옷걸이를 넘겨간다. 잡혔다. 그래 이 촉감이다. 칼라 한쪽이 다른 옷들에 눌려 접혀 있는 것만 빼면 오래전 꺼내 입던 모습 그대로였다. 셔츠의 양쪽 어깨를 잡고 들어 올려다본다. 머릿속에 잡히는 건 그날들의 감촉이었다.그날들의 감촉이라는 건 스물넷, 한창 이 셔츠를 입고 다니며 내가 있던 자리에서 나를 감싸던 기분과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관한 단상이다. 갓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복학을 앞두고 있던 무렵 내가 사는 도시 롯데백화점에 유니클로 스토어가 입점했다. 화이트 드레스 셔츠와 검정 셔츠 그리고 검정 바지를 샀다. 몇 해 전 이삿짐을 꾸리면서 다른 옷들은 처분했지만 검정 셔츠는 남아있었다. 같은 날 구매했던 다른 옷들은 버려졌는지만 십여 년이 넘게 남겨진 단추까지 새까만 이 셔츠는 그때의 내가 이 검정 옷을 산 이유를 상기시켰다. 양조위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즈음 봤던 영화 무간도[1] 1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진영인이었다. 경찰 신분을 숨긴 채 삼합회 조직원으로 존재하는 진영인의 삶이었다. 깊은 눈으로 연기하는 양조위는 배역에 따라 눈에 담겨 있는 현상(現象)이 다르다. 영화 중경삼림과 화양연화에서도 여전히 깊은 눈에 각각 다른 것이 담겨있다. 험난한 세상 혼자 짊어지고 가겠다는 진영인의 눈. 나는 그 눈이 잊히지 않았다. 몇 장면에서 검정 셔츠를 입은 모습이 내가 검정 셔츠를 다시 찾게 했다.   



  이천십년 오월이었다. 대학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렀다. 생지 데님에 검정 셔츠로 갈아입었다. 캔버스화에 발을 욱여넣고 밖으로 뛰어나왔다.구겨 신은 뒤축은 터미널로 가는 버스에서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임시 터미널은 붐볐다. 기존 노후화된 터미널을 허물고 새로 지어가는 동안 사용되는 터미널이었다. 임시로 사용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새 터미널이었다. 새것은 산듯하지만 엉성하고 서툴다. 서로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겹치는 일과 줄지 않는 줄이 그랬다. 흡사 그때 나의 모습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를 돌아선 사람의 마음을 되돌려보러 가는 길이었다. 도무지 무슨 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로 인천국제공항행 표를 끊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차량에 기대어 창밖을 본다. 낯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서 언덕너머 있는 존재가 친근한 개인지 무서운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그 사람이 나를 만나러 내려와 주었던 차선을올라가는 반대 차선에서 보고 있다. 나를 만나고 혼자 올라가던 차선 위에 내가 있다. 확실한 건 얼마 뒤 반대 차선으로 내려올 나였지만 두사람이 내려올지 혼자 내려오게 될지 불확실했다. 잠에 들었다. 눈을 뜨니 고속버스 내부는 전부 어두웠고 엔진소리와 창문에 찢어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도 버스는 한참을 달렸다. 나를 보기 위해 긴 시간을 지나온 그 사람의 시간을 그제야 알았다. 그 사람의시선 반대에서였다.  



  밤의 공항은 아늑한 빛이 채워져 있었다. 네온사인 같은 발광하는 빛이 아닌 나에게 공항이라는 이별과 만남 그 중점인 지점에 근사한 빛들이 들어있었다. 평일 밤 공항은 한가로웠다. 비워진 것만 같은 생경한 공간은 내 마음이 가라앉게 했다. 이 공항 어딘가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있을 그 사람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겨두었다. 종종 승무원들을 봤다. 단단히 고정된 헤어와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걷는 선임과 뒤를 따르는 후임들의 모습은 수척한 내 모습과 대조되었다. 감정이 복잡한 회신을 서로 주고받으며 결국 오전 아홉 시 9번 입국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이미 알아 버렸다. 내가 구매할 버스 탑승권의 수량을. 그녀를 만나 마지막 인사를 하는 걸로 이곳에 온 목적을 바꿨다. 하려던 일에 마음을 접어버린 나는 어딘가 후련했다. 진작 이래야 했을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납득할 수 없었을것이다.  



  먼저 와있던 나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습을 봐가는 게 어려웠다. 정이란 게 없는 눈빛은 서늘했다. 코가 닿는 거리에서도 그녀를보곤 했었지만 처음 보는 눈이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내가 꼭 해야 할 말을 전했을 뿐이다. 지난밤공항에서 리포트지에 적어둔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받은 그녀는 돌아섰고 나는 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봤다. 담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이 점점 차가는 아침의 공항을 둘러봤다.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바삐 어디든가는 사람들을 본다. 돌아선 나는 승차권 한 장을 구매해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이동하며 막 이륙하는 비행기를 봤다. 살아 움직이는 듯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을 향해 오르는 비행기. 비행기 꼬리에 적혀있던 Thai가 아직도 선명하다. 한 꺼풀 벗겨진 삶을 버스에 싣고 내가 본 비행기같은 비상을 꿈꾸며 깊은 잠이 들었다. 자면서 흘린 침들이 검정 셔츠에 허옇게 말라 있다.


          

 

[1]무간지옥(無間地獄) “무간지옥에 빠진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18층 지옥 중 제일 낮은 곳을 칭하는 용어로, 가장 고통이 극심한 지옥을 일컫는다. 죽지 않고,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공간인 무간지옥으로 이르는 길이 곧 무간도(無間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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