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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Sep 14. 2023

소울메이트가 있는 삶

한 사람이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한 사람에게 그만한 힘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내게 자랑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름과 나는 어느덧 칠 년 지기다. 나는 름을 '친구'라고 칭할 때마다 부족한 느낌을 받는다. 빈약하다. 누군가에게 나를 지구인이라고 소개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누가 름에 대해 물으면 진부하지만 소울메이트라고 말한다.


나는 학창 시절 그때그때 마음이 통하고 코드가 맞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딱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다 그런 줄 알았는데 동생은 아니었다. 친한 친구야 늘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마음과 코드가 다 맞는 친구는 없었다고 한다. 어떤 친구와는 마음은 통하지만 코드는 맞지 않고, 어떤 친구와는 코드는 맞지만 마음은 통하지 않는 식이었다. 그래서 취향이 비슷한 핫플 메이트, 한 번씩 한바탕 노는 메이트, 속 얘기 메이트, 공부 메이트 등이 따로 있었다. 조각보처럼 조각조각 자기를 충족시켰다.


름과 나는 서로를 폭넓게 쓴다. 우리가 읽고 쓰는 이야기만 하거나 사는 얘기만 했다면 혹은 가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친하더라도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모든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통합적으로 알고 있다. 카페 사장으로서의 나, 딸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가 아니라 총체적인 나를.




대학교 때 단짝 친구였던 희도 나와 넓은 영역을 공유하던 친구였다. 우리는 대학 내내 붙어 다녔다. 나는 희와 인생의 핵심 경험이 될 만한 것들을 전략적이다시피 함께 했다. 둘이 중국으로 교류유학을 갔고 졸업식에 안 가고 유럽여행을 떠났다. 잘 통했고 재밌고 편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일 수 있었다. 문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는 미성숙했다는 것이다. 그 애는 어느 날 훌쩍 떠났다.


한 시절을 함께 통과한 단짝 친구들과 름의 결정적인 차이는 름과 있을 때 가장 나은 내가 된다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이면서 가장 나은 나이다. 희가 떠난 충격과 상처로 성장했기 때문일까? 만약 내가 성장해서 이런 관계가 가능한 거라면, 내 능력이라면, 왜 남자친구나 다른 사람과 이런 관계를 반복할 수 없을까?


그 일은 확실히 내게 자국을 남겼고 그때보다는 나은 인간이 됐지만 무엇보다 '합'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두 가지 화학물질이 접촉하는 것과 같다. 어떤 반응이 일어나면 둘 다 완전히 바뀌게 된다.'는 융의 말처럼. 연애 조언 중에도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났다는 분명한 증거는 함께 있을 때 변해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함께 있을 때 서로가 될 수 있는 최대치의 인간이 된다. 한없이 너그럽고 다정한 인간이.




름은 예전 한 남자친구와 주말이면 전국 팔도를 쏘다녔다. 축제와 핫플을 섭렵했다. 그와 '할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장소가 데이트의 주인공 자리를 꿰찬 셈이다. 름과 나도 이왕이면 좋은 곳에 가려고 하지만 혹 기대에 못 미치거나 못 가게 돼도 별 상관없는데, 우리는 서로의 앞에 앉아있고 그게 우리의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에 일기를 쓴다. 그간 통과한 일들과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비로소 그 일을 소화한다. 서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다.


얼마 전 나는 음습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서운했고 서러웠고 인생이 암울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가기로 한 터라 덮어둔 채 떠났다. 여행 중 생일에 름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심해에 있다는 걸 알았기에 재촉하지 않고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그중 '모든 일을 전달할 필요는 없지만 서로 어떤 마음일지 모른다는 건 무서워'라는 말이 있었다. 살다 보면 서로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순간도 올 것이다. 요 근래처럼 어렴풋이 아는 때도 있을 거다. 곧장 답하진 않았지만 나는 름을 생각했다. 나를 생각하고 있을 름을 생각했다. 서로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깊이 가라앉아 있을 때 로프가 되어 주었다. 충분히 가라앉은 뒤 로프를 잡고 올라오면 름이 있다.


나는 그 여자가 혼자 / 있을 때도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 나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여자의 / 울음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그 여자의 울음은 끝까지 /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임을 나는 / 알고 있다 / 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울음을 듣는 / 내 귀를 사랑한다

정현종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


우리는 만나 웃고 떠들고 샅샅이 이야기하면서도 '끝까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인 슬픔이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만의 몫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가까이 있어. 우리는 서로의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사랑한다. 름은 '이교대 눈물'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우리가 같이 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같이 웃지만 울 때는 한 명씩 번갈아 방위를 선다. 우리가 이교대로 우는 한 아주 깨부서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우리 우정을 사랑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웃는다. 내가 한 합평 소설에 우정에 대한 소설을 써갔을 때 몇몇은 사랑으로, 퀴어 소설로 읽었다. 우정이라기엔 너무 진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우정이 진해지면 사랑일까? 우정과 사랑은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깊은 우정에는 사랑이 있고 깊은 사랑에는 우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나를 발견해 주고 북돋아 주고 발휘하게 해주는 나의 자랑 름에게 감사를.



덧.


우정과 사랑을 나눌 때 여러 명과 가능한지 오직 한 사람과 가능한지를 잣대로 삼곤 한다. 우정은 복수이고 사랑은 단수일까? 친구는 여럿일 수 있지만 소울메이트는 사랑처럼 한 명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알면 떨떠름할 수 있지만 각자 겪은 거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모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한때 가까웠지만 이제 소원한 친구와의 만남에서 느낀 잉여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프 더 레코드다. 반대로 그 친구에게는 름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잉여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잉여감정이 없는 관계란 얼마나 드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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