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쓰다가
남의 오해는 그렇다 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느낄 땐 슬프다. 부모나 연인처럼 가까운 이의 오해는 가스라이팅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악의적인 게 아니라 자기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말하는 경우도 있다. 아빠가 그렇다.
아빠는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습관적으로 비난한다. 우리 애들은 철부지고 성격이 이상하고 문제가 많다. 결혼도 못할 것이다. 늘 후려친다. 때로는 농담처럼 때로는 불같이. (둘이 있을 땐 그러지 않는다. 멘토가 된다. 미스터리다.) 우리는 아빠가 정말로 그렇게까지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빠의 성질머리를 건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듣는다. 별 수 없이 비를 맞는 사람처럼.
아빠는 우리를 사랑한다. 그는 가족밖에 사랑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쉬는 날이면 항상 가족 나들이를 다닐 정도로 가정적인 면도 있다. 그리고 영민한 사람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소수의 사람 중에선 가장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럴까? 부모가 짐승처럼 싸우는 집에서 뒤틀려 자랐기 때문일까? 독기로 살았기 때문일까? 아빠는 우리뿐 아니라 이 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본다. 늘 마뜩잖다.
어느 날에는 아빠 딴에 장난처럼 퍼붓는 소나기 같은 비난에도 감기에 걸린다. 얄미운 건 아빠는 일상적으로 주변에 상처를 주지만 여리다는 점이다. 상처를 줄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나는 아빠가 들으면 죽을 때까지 기억할 만한 말을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다. 아빠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만 다 잊었을 것이다. 동시에 책장 사이에 꽃잎을 끼워두는 짓도 한다. 따듯함과 순수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언젠가 황정은의 책에서 '연약하다니 교활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아빠를 떠올렸다. 교활한 짓인 줄도 모른 채 연약한 사람. 강하고 연약한 사람.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 방에 자러 가면 거실에서 부모님이 자기 흉을 봤단다. 아빠가 된 그는 아이가 방에 자러 가면 한동안 아내와 아이가 오늘 한 예쁜 짓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에 반응하는 성인으로 자랐다.
나도 나를 믿어주고 북돋아주는 아빠를 갖고 싶다. 사실 나는 그런 아빠도 갖고 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지점이다. 아빠는 나를 믿어주며 북돋아주기도 한다. 표현하는 법은 없지만 느낄 수 있다. 학창 시절에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읽은 적이 있다. '칭찬은 속삭임처럼 듣고 비난은 천둥처럼 듣는다'는 말이 나온다. 나도 그렇다. 아빠는 칭찬은 속삭임처럼, 비난은 천둥처럼 한다. 원래 표현을 잘 못한다는 사람들 중에 분노는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표현을 못하는 스타일이라면 일관성 있게 못해야 하지 않을까?
한 번은 아빠가 동생과 싸운 내게 대뜸 '쟤는 지 멘탈 관리 밖에 모르는 애'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멘탈 관리를 열심히 하려고 한다. 멘탈과 성격이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강할 때 나는 선하다. 내가 약할 때 나는 엉망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높은 정신을 유지하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상처받은 나머지 아빠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구나, 나를 그저 이기적인 애로 생각하는구나 하며 내가 나를 더 상처 줬다. 동생은 안타까운 듯 '그런 건 아니라는 거 알잖아' 하고 말했다. 사실 아빠는 내가 성장 욕구가 강한 것을 좋아하고 나도 알고 있다.
친구 름과 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마음속에 밤송이처럼 떨어질 때, 뾰족한 밤송이를 함께 까는 사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사람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걸 거야. 껍질을 까서 알맹이만 듣도록. 껍질과 전혀 다른 질감의 알맹이가 있으므로. 많은 일들이 밤송이채 주어져도 름과 함께 까곤 했다. 하지만 혼자인 어느 날에는 상대가 던진 밤송이를 껴안고 뒹굴기를 택한다. 알맹이가 뭔지 궁금하지 않다. 당신이 내게 던진 게 밤송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흘린 피를 보여주고 싶다.
한동안 나는 아침에 준비하며 자기 계발 유튜브를 듣다가 아빠가 오면 껐고 조깅을 하다가 아빠를 만나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지나갔다.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싫었다. 아빠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슬퍼졌다.
며칠 전에도 저녁을 먹는 내내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어른이 돼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너희는 성격 장애가 있다는 말도 들었다. 어쩌다 쎄게 나온 말 같지만 기분이 팍 상했다. 어른이 자식에게 그렇게 말할까? 그렇게 말하는 게 성격 장애 아닌가? 내가 정색하고 말한다면 아빠는 펄쩍 뛸 것이다. 아빠는 자기에게 맞서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이라고 아빠를 비난한다고 비난을 멈출 리도 없다. 비난으로 사람을 일깨우기는 힘들다. 우리는 일찍이 바람으로는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없다는 걸 배웠다. 해님의 승리를 기억하자.
동생은 엄마아빠의 '네가 예민해서 그래'라는 말에 질려 있다. 그 말이 자신을 예민하게 만든다고 했다. 동생에게 예민한 면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게 최종적이거나 고정된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런 면이 두드러지는 시기를 겪고 있지만 다듬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동생에게는 엄마아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네가 되고 싶은 너에게 집중하라고 했다. 엄마아빠 그리고 나는 동생에게 반응할 뿐이다. 동생이 달라진다면 반응도 달라질 것이다. 반응을 먼저 바꿀 순 없다. 어려운 일이지만 순서가 그래. 제 머리는 못 깎는 중이 말한다.
이제 나도 비난의 비에 쫄딱 젖기 전에 우산을 펴겠다. 비가 튈 순 있겠지. 하지만 내리는 비와 싸우는 사람은 없다. 날씨는 그냥 날씨다. 그러다 보면 투명 비닐우산이 좋은 차 사면 주는 튼튼한 장우산처럼 짱짱해질지도 모른다. 비수를 꽂으려 할 때 착 펼 수 있을지도. 부모는 자식의 기후다.
우리는 자신은 남들을 꿰뚫어 볼 수 있지만 남들은 자신을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도 내가 아빠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필립로스 <미국의 목가>에 무릎을 탁 치게 한 문장이 있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좋게 오해하든 나쁘게 오해하든 사실과 얼마큼 가깝고 멀든 간에.
타인에게 오해의 자유를 줄 때 우리는 그 오해에서 풀려난다. 오해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은 오해를 바로 잡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오해의 자유를 주고 오해를 그들의 것으로 두는 것일지도. 오해라고 발끈하는 대신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고 그치는 상상을 해본다.
제목은 백은선 작가의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