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아주머니 손님 두 분이 오셨다. 차를 끓이고 있는데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 부모님 가게에서 포장 주문을 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50분. 가게는 11시 30분 오픈인데 11시 30분까지 준비해 달라고 했다. 가게에서 40분까지 가능할 것 같다고 했는지 몇 마디가 더 오가다 끊겼다. 30분까지 해주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장사 된다고 주인이 안 하니까 그래. 그치, 주인이 붙어 있어봐 해주지. 둘이 맞장구치며 흉을 봤다. 열이 확 받았다. 어젯밤 엄마는 등에 파스를 다닥다닥 붙이고 잤다. 아침에도 쉰 다음날이라 할 게 많다며 8시에 서둘러 내려갔다. 순간 쫓아가서 말하고 싶었다. 주인이 직접 하거든요!
배짱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오픈 전에는 재료를 손질하고 점심 장사를 준비한다. 시간이 빠듯해서 아침도 후다닥 먹는다. 왜 아직 오픈도 안 한 가게에 전화해서 재촉할까? 해준다는데 왜 씹을까? 허겁지겁 밥을 먹고 서두를 엄마가 떠올라 속상했다.
하지만 손님의 말이나 행동에 붉으락푸르락하는 건 프로답지 않다. 음료가 아니라 기분을 서비스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거늘. 나는 집에 온 손님이 볼까 잡동사니를 옷장에 대충 쑤셔 넣을 때처럼 미움을 감추고 커피와 차를 내간다. 맛있게 드세요. (스마일) 흘깃 그들의 얼굴을 본다. 뒤돌자 옷장에 구겨 넣은 것들이 굴러 떨어진다. 다음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왜 그럴까? 가게 사정을 몰라서 그럴 순 있지만 왜 함부로 말할까?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11시 30분이 넘어서 나갔다.
장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반면교사의 나날이다. 밥 장사를 30년 한 엄마아빠에게 저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어쩌다 부모님 가게 뒷담화를 들어서 그렇지 별 일 아니긴 하다. 설거지를 하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몰라서 그렇다. 식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나도 ZARA의 시스템을 몰라서 옷을 뒤적거리며 직원의 속을 긁었을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순 없다. 몰라서 실수할 수 있고 오해할 수 있다. 어쩌면 오해는… 그들의 자유다. 오해를 그들의 자유라고 생각하자 나도 그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오해는 그들의 자유고 그들의 것이며 그들이다.
요즘 나는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자유自由,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다. 나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자유로운 삶이란 다른 무엇이 아닌 나로 말미암는 삶이고. 그러니 '나'가 바로 서야 한다. 자유를 주면 그 사람이 드러난다. 오해하는 일도 오해받는 일도 피할 수 없지만 내가 바로 서면 적어도 함부로 오해하거나 오해를 오해로 되갚진 않을 것이다. '조개껍데기는 녹슬지 않는다'는 속담을 주워 들었다. 어진 사람은 주변의 악한 것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고 싶을 때 이 진주 같은 속담을 떠올려 보기로.
새삼 연예인들이 대단하다.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을까? 쫓아가서 반박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을까?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혼잣말을 얼마나 많이 할까? 유명인으로 죽지 않고 살려면 자기를 띄운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무리 거대하고 호화로운 배라도 가라앉을 테니까.
덧.
아침에 김밥집에 갔다. 작은 공간에서 두건을 쓴 아주머니 대여섯 분이 부지런히 김밥을 마는 곳이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바빴다. 11시에 10줄을 예약한 손님이 조금 일찍 왔다. 김밥은 아직 준비 중. 작은 가게가 복닥복닥했다. 아주머니들은 그 여자분이 새로 온 손님인지 전화로 주문한 사람인지 헷갈려 보였다. 그 여자 손님은 혼란스럽게 하고 서두르게 한 게 미안한 듯 "죄송해요. 제가 좀 일찍 왔어요." 하고 말했다.
10분 정도 일찍 온 것뿐이니 사과할 일은 아니었지만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준 것이다. 그 마음이 뜰채로 연못 위의 낙엽을 걷어내는 것처럼 가게 안의 긴장을 걷어냈다. 분주히 일하던 아주머니들이 부드러워졌다. 누가 우리를 헤아려주면 우리는 사르르 녹는다. 우리의 오해가 우리의 것이듯 그 아량도 그 사람의 것이고 그 사람이라는 생각. 친절하자는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