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 하는 아이를 데려오는 길이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친구들과 놀았는지, 간식과 점심식사는 잘했는지, 낮잠은 잘 자고 일어났는지를 묻고 답하는 중에 아이가 말한다. "엄마 우리 황토방에 가서 놀아요" 순간 황토방 뜨거운 온돌바닥이 그리웠는데 아이에게 이심전심 전해졌나 보다.기쁜 마음으로 답했다. "그래, 우리 한국사람들은 뜨거운 바닥에 몸을 지지며 살아야 해" 그렇게 온돌과 보일러와 난로의 차이를 묻는 아이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곧장 황토방으로 들어가 아이는 안마의자에 앉아 디즈니채널에서 주토피아를 보고 있었고, 나는 반팔 티셔츠만 입은 채로 아궁이 최대한 가까운 곳 온돌바닥에 누워 온몸을 돌려가며 지지고 있었다.
저녁 6시가 다 되었는데도 인근에 사시는 고모댁에 잠깐 가셨다는 부모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저녁밥을 먹을 시간인데 4인 밥상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시는 가장 중요한 두 분이 빠지셨다. 남은 두 명중 한 명은 하루 종일 한 끼도 먹는 둥 마는 둥 관심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한 숟가락씩 떠먹여야 입을 여는 상황이다.
떠먹이는 밥을 겨우 먹는 편이라 평소 배고프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는 저녁식사를 은근슬쩍 건너뛸까 하는 어쩌면 합리적인앙큼한 생각을 잠깐 해 본다. '아마도 아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씻고 잠을 잘 거야. 분명 그럴 테지... 음음... 그냥 주토피아가 다 끝날 때까지 몸이나 좀 더 지지다 2층으로 올라가 씻고 우유 한 컵 먹여 재울까?' 하는 갈등이 차 오른다. 하지만 어찌 어미가 되어서 밥 달라 말하지 않았다고 자식을 굶기고 재워서야 쓰나...라고 자책을 하며 이내 몸을 추슬러 일어난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입안에 뭘 넣고 씹고 삼키는 행위, 그처럼 먹는 것도 싫을 때가 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특히 세상에 아이를 내어놓은 엄마가 된 이상 본인의 욕구가 어떠한 상태이든 아이를 위해먹거리를 준비해 줘야 하는 책임을 져버릴 수는 없다. 엄마가 되고 나서 깨달은 그 첫 번째였다.친정엄마와 함께든, 어린이집에서든 아이가 배불리 밥을 잘 먹었다는 소리만 들으면 그 순간 찾아오는 안도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몇 끼를 거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 배만 부르면 세상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비록 나는 매 식사를 챙겨 먹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내 아이 배를 곯릴 수는 없다.
그만 2층으로 올라가 밥을 먹자니까 아이는 자신은 주토피아를 보고 있을 테니 엄마는 2층에 가서 밥을 준비해 오라고 또렷하게 말한다. 그러마 아이의 요구를 존중하여 황토방에서 밥을 먹기로 결정한다. 바지런을 떨어 황토방 쿠쿠에 쌀을 씻어 취사 버튼을 눌러두고, 2층으로 올라가 햄 한 캔을 따서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내려오던 참이었다. 햄에 쌀밥 한 그릇 간단히 한 끼 먹기에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애써만족하며 말이다.
황토방 문을 여니 친정부모님께서 그 사이 돌아오신 모양이었다. 아이 옆에 앉아 계신 친정아버지는 "아니 여태 애 밥도 안 먹이고 뭘 한 게야"라고 물으시고, 친정엄마는 "혼자 있는 시하한테 밥을 먹었냐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기에 아니 너네 엄마는 이 시간이 되도록 애 밥도 안 먹였냐고 했지. 그랬더니 마치 다 큰 애처럼 '엄마가 밥 해놨어요'라고 하기에 보니까 밥이 되고 있는 중이더라. 엄마는 어디 갔냐고 하니까 '엄마는 2층에 요리하러 갔어요'하는 거야. 그래서 에구 그래도 자식 해 먹이겠다고 그런데 아니 얘가 뭘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뭘 해 오려나 궁금해하고 있었지"라고 말씀하신다.
요리라니... 순간 내 손에 들린 접시, 구워진 ㅇ팸이 창피하여 슬그머니 내려놓고 보니 친정엄마는 어느새 소고기를 작은 프라이팬에 구워 오셔서는 기름장에 찍어 밥과 함께 아이 입이 미어터지도록 넣어주고 계셨다.엉거주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면서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엄마, 그래도 내가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 뭘 할 줄 아는 게 없다니요. 다 해 먹고살 수 있어요"라고 말하자 친정아버지는 차라리 눈을 지그시 감으신다. 엄마는 다시 밥 한 숟가락을 떠서 기름장을 찍은 소고기를 한 조각 올린 후 제비 새끼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이에게 먹이시며,
"이것아, 시하가 조금만 더 크면 밥이며 다 차려놓고 너보고 먹자고 할 거다"라고 말씀하시기에 입을 꾹 다물었던 터다.
무릇 어미라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기쁨으로 살아야 하거늘, 아이 키우며살고 있는지 4년 차가 다 되도록 식사시간만 되면 패닉에 빠져드니 육아(!)는 도통 적성에 맞지 않는 까닭이다. 이걸 변명이라고 나는 엄마의 헌신적인 밥상으로 만들어진 밥심으로 지금껏 버티며 살아왔는데, 어쩌다 보니 내 아이 또한 할머니의 밥상으로 포동포동함을 되찾으며 지내고 있는 터, 친정엄마의 고통은 말로 다해 무엇하랴.
이따금씩 어쩌다 마음이 동해 곰손을 뚝딱거려 아빠가 좋아하는 카레, 유부초밥, 엄마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어 가면 "어머, 시간도 없는 네가 뭐 이런 걸 다 했어"라며 반기시는 엄마다. 부지런한 손으로 금세 한상을 차려내는 친정엄마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딸이고 내 아이에겐 부끄러운 엄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엄마의 손맛이 미치도록 그리울 그 날이 올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오늘도 딸과 손주 먹거리를 걱정하는 친정엄마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