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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쌍 Jan 29. 2020

육아는 인형놀이가 아니었다

아이의 취향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기



몇 달 전 아이 어린이집 같은 반 엄마들이 모였을 때 일이다.

이맘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옷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아이 엄마는 아이가 매일같이 번개맨 그 옷 한 벌만 입는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빨래가 골치라며 우스개 소리 했다. 그때 생각이 났다.




그보다 두 달 전 어느 밤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누웠는데 아이가 갑자기 정적을 깨고 


"엄나 번개맨 옷 사주세요"


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내 반응에 아이는 마치 애원이라도 하듯 말했다.


"번개맨 옷이 입고 싶어요. 엄마 번개맨 옷 사주세요"


지금껏 아이에게 사 주었던 캐릭터 옷은 첫돌 즈음 구입했던 한 두 벌의 미키마우스 옷이 전부였다. 내 유년시절에 보았던 미키 마우스가 나에게 익숙했던 이유였을까? 물론 고글을 쓰고 나와 외치는 번개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알록달록한 옷이 예쁘다는 생각 해 본 적은 없지만 아이가 무엇인가 진지하게 사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게 처음이어서 내심 신경이 쓰였다. 다음날 아이가 한 말이 생각나 검색은 해 보았지만 종류가 너무 많아 고민하다 구입 차일피일 미다. 실은 사고 싶지 않았던 것, 즉, 내 아이에게 그런 옷을 입히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의 그 진심 어린 호소도 조금씩 잊졌다.



"어머, 우리 아이도 번개맨 옷 사달라고 했데요"


라고 말하자, 엄마들은 그래서 사주었냐고 물어본다.


"아뇨..."


"왜요?"라고 되묻는 아이 엄마들에게


"글쎄, 제가 그런 캐릭터 옷을 싫어해서요"


라고 답했더랬다. 그때 아이 엄마들은 '엄마 취향으로 결정하네요'라고 말하며 큭큭 웃었다. 나도 멋쩍게 웃었다. '엄마 취향대로' 그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출산 후 3층 입원실에서 일주일, 4층 조리원에서 2주를 보내고 퇴원한 이틀째였다. 남편이 급한 일이 있어 출국하는 바람에 나 혼자 제주도에서 3주를 보내야 했다. 한참 온 에너지를 끌어모아 용쓰기를 하던 핏덩이를 데리고! 임신 준비부터 태교까지는 완벽하다 자부했지만 진심으로 육아의 '육'자도 모르고 시작된 육아였다. 친정엄마가 며칠 봐주고 가셨지만 잠을 못 자고 하루 열 분유를 이고 트림시키고, 기저귀를 바꾸는 일에다 4~5kg 아기를 매일 같이 수십 번을 들어 올리는 일은 극기훈련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아이가 단 1초도 더 울지 못하도록 '잉~' 소리만 내도 즉각 반응했기에 긴 머리는 항상 묶은 상태로 쪽잠을 잤다. 게다가 그 많은 젖병을 씻고 열탕&살균소독까지 하느라 생사를 오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생후 30일째였을 것이다. 미리 예약해 둔 아이 예방접종을 해야 했기에 외출이 불가피했다. 남편이 일주일 후면 오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혼자 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꼬물거리는 아이를 씻기고 로션을 바르고 첫 외출복으로 준비해 놓은 쁘띠 바또 (Petit Bateau) 생후 1개월용 바디슈트를 입히는데 왜 그렇게도 설레고 뿌듯하였던가!


첫 외출을 준비하던 날!


임신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그 옷을 사다 놓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았던 애틋함이 떠올라 물이 흘러내렸다. '뱃속에 있던 그 녀석이 이 옷을 입게 되다니...' 꼬물거리다 못해 바둥대는 아기의 두 팔과 다리에 옷을 끼워 넣고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면서 뽀얗고 뽀송뽀송해진 아기의 촉감을 느꼈을 때, 리고 그동안 흰색 베넷저고리만 입고 있던 아기가 파란색 멋진 디자인의 바디슈트를 입었을 때  나는 '아, 육아는 인형놀이였구나!'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버던 것이다. 재미를 느껴버리니 힘든 줄도 모르고 아이의 꽃단장을 먼저 완벽하게 마다. 내가 입혀주는 옷과 소품들로 외출준비를 끝낸 아이와 완벽한 인형놀이를 한 셈이었다. 신이 나서 부기 안 빠 나도 모처럼 꾸미고 둘이 첫 외출을 나섰더라니,  행복했던 기억이 뇌리에 박버린 까닭이다.




좌: 취향을 존중하여 그가 선택한 번개맨 옷을 입은 아이. 우: 아이를 위해 할머니가 사준 아이언맨 티셔츠. 애들 키우는 집에 있을 법한 흔한 풍경들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매일 저녁 다음날 무엇을 입힐까를 고민하며 옷을 미리 골라두는 건 고된 육아를 잠시 잊는 순간이다. 상, 하의 색을 맞추고, 더 어울리는 옷은 없는지 찾아보며 등 따뜻하게 조끼를 입힐까, 카디건을 입힐까를 고민하고, 양말, 목 워머, 외투를 결정한다. 화려하고 비싼 옷으로 치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입히지도 않겠다는 나의 굳은 의지다. 그런데 요즘 40개월 아이에게 벌써 취향이란 게 생겨버렸다.


남자아이라 까탈스럽게 굴지 않을 테니 뭘 입히든 무덤덤할 테지... 했던 나의 예상을 깨고 아이는 최근 확고한 그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아이가 원하는 캐릭터 옷을 집에 들이고야 말았다. 아이가 원하는 만큼 일단 수용해줬다. 고맙게도 대부분의 경우 엄마원픽을 받아들이지만 툴툴거릴 때는 아이의 선택 존중해 캐릭터 옷 입혀준다.


어린이집에 가면 그 많은 아이들 속에 평범한 한  우리 아이도 있다. 모두가 눈 번쩍번쩍하게 만들어 주는 엘사 여왕들이고, 번개맨, 번개걸들이다. 모두 다 같은 캐릭터 옷을 입고 싶어 하는 또래집단에서 모노톤한 색의 옷들을 입고 있었던 내 아이가 느꼈을 소외감(?)을 생각하면 왜 진작 이 반짝이는 오색빛깔의 옷들을 사주지 않았을까 미안할 정도다.


아이는 오늘도 번개맨 옷을 입고 신나게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다. 허리 벨트에 있어야 할 장식이 진짜가 아니라는 볼멘소리를 한 번 했지만 그럼에도 그 자신이 번개맨이 된 것에 무한 긍지를 느끼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순리대로 가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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