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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달 May 09. 2023

나를 무용하게 만드는 사랑

그래도 사랑하며 사는 일은




 존재의 쓸모는 분명 유의미하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분야에 훌륭하지는 못할지언정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보다 빨리 발견한 사람은 정신적·물질적 풍요로움을 느낀다. 존재의 쓸모란 사회적으로 유능하다고 판단되면 주는 여러 보상 중 하나 같으면서도 어쩌면 사회가 아닌 집단이나 개인이 주는 것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기업적이거나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친한 친구들, 가족, 애인이 존재의 쓸모를 선물하기도 하니까. 존재의 쓸모란 삶의 유일한 가치이며 존재 자체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연 존재의 쓸모를 박탈당할 때가 있다. 나를 무용하게, 쓸모없게, 무가치하게 만들어 내 존재의 쓸모를 쥐락펴락하는 것. 줄 것 같으면서도 잽싸게 뺏어가다가 끄트머리 조각 부분 보여주며 네 것이라고 협박하는. 사회적이거나 기업적으로는 대학교 불합격, 취업 실패, 이혼 같은 게 있다고 하면 개인이 주는 존재의 쓸모 박탈의 사유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지독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무용한 일.


 사랑이란 감정은 애당초 인간이 탄생할 수 있게 만드는 근본적인 감정이거니와 반대로 인간이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감정이다. 전 지구 사람들의 거대한 관계망을 묶고 있는 단 하나의 공통점. 그러나 사랑은 때때로 우리에게 절망스러운 무가치함을 선물한다. 왜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사랑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무용하게 만들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동시에 타인과 인과관계를 갖는 사랑이란 상호보완적이며, 흔히 대화에서 말하는 '핑퐁'이 이루어져야 건강한 감정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게 비로소 건강한 감정일까. 내가 아무리 분에 맞지 않게 내 살점을 떼어다가 그 사람에게 준다 한들 그 사람은 내 찢긴 살가죽을 치유해 줄까. 살가죽은커녕 세포 덩어리인 머리카락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헌신하는, 기울어진 그네 같은 사랑 속에서 나는 '존재의 쓸모'를 인정받고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랑을 영위할 수 있을까? 존재의 쓸모를 제공해 줄 내가 바라는 상대의 시야에는 내가 잡히지 않는데.


 당신이 연애를 하거나 단순한 이성 관계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핑퐁'이 이루어지는 관계를 겪었다면 그 사랑의 대상이 주는 존재 자체의 쓸모에 대한 풍요로움을 반드시 느꼈을 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쓸모를 부여하고, 우리는 사랑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몸이다. 그 누구도, 사람을 넘어 행위까지 포함해 그 어느 것도 사랑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재미, 아니 무슨 이유로 살아갈까. 혼자 사는 게 좋다는 이들은 혼자 할 수 있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용하다. 이 비극적인 무용함은 나를 애정결핍의 구렁텅이로 내몰곤 했다.


 사랑이 존재의 쓸모를 부여한다. 우리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다. 나는 이 명제를 굳건하게 믿었고 무엇이든 사랑하려고 애썼다. 나는 내가 소중하고 좋아하다고 느끼면 무조건 헌신했다. 무엇이라도 사랑해야 내가 비로소 존재하니까.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사랑을 줬다. 문제는 지나치게 헌신적이고 나만 희생하는 관계였다는 거다. 내게 좋지 않은 영향을 행사하는 친구마저도 사랑으로 감쌌다. 어려서, 서툴러서, 실수여서라는 핑계로 친구를 감싸고돌며 용서하는 척 그를 사랑했다. 연락을 잘 안 받고, 약속을 자주 파기하거나 늦고,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도 쉬이 멀어지지 않고 되려 매달렸다. 아예 나를 괴롭히거나 성적으로 희롱한 사람마저도 용서하는 '척'하며 어울렸다. 사실 용서하는 건 겉치레였다. 나는 내가 준 사랑을 돌려받지 않으면 무가치하게 느껴질 내 존재의 근본적인 불안감 때문에 그가 나에게 어떤 짓을 하든 억지로 그를 사랑하려 애썼던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존재를 유의미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로 만드는 무용을 선사한다.


 나는 이 사랑의 무용을 무척이나 개탄스러워했다. 사랑이 존재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려 해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를 비판할 마땅한 근거를 찾아보려 끝없이 생각해 봤지만 내린 결론은 '우리는 결국 사랑 없이는 무용한 존재'였다. 어떡하지, 사랑으로 인해 생긴 결핍도 결국 사랑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걸. 그렇다고 나는 날 사랑할 자신도 확신도 없어. 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 고독한 비극에 대해서 곱씹어야 했다. 남자친구니 뭐니 소개받으려고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대는 우스운 꼴도 결국 이 고독을 메꾸려고 했던 웃긴 짓들이었다.


 비단 연애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했다. 난 한시도 혼자 있지를 못했다. 방에 혼자 있다 한들 단지 물리적으로 혼자 있을 뿐이었고 항상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친하지 않은, 데면데면한 친구에게 마저도 대뜸 안부 인사 랍시고 '안녕'을 보내기도 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나로서 오로지 존재할 수가 없기에.


 그러면, 이 사랑이 부여하는 존재 가치를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을까. 대개 이런 글에는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그에 타당한 근거를 나열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은 그렇지 않다. 난 여전히 이 사랑의 무용함과 싸우고 있고 혼자 있을 때면 날 덮치는 무용함의 무력감과 쓸쓸히 조우하고 있다. 단지 조금은 익숙해지고 있단 게 발전이라면 발전일까.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남자를 소개해달라니 연애하고 싶다니 우스운 꼴을 하지도 않는다. 확실하 사랑받아, 존재로서 완전해지고 싶다는 욕심을 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홍보하고 떠벌리고 다닌다고 갑자기 유니콘처럼 금발의 왕자님이 어느 대한민국 화성시 동탄에 있는 나루 고등학교 2학년 7반 앞에 대뜸 놓일 리가 없는걸, 멍청하게도 최근에서야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 존재를 증명해 달라는 것을 호소하고 있지는 않다.


난 그러나 여전히 외롭다.


고독하다.

쓸쓸하다.

무력하다.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난 지독하게나 외롭고 여전히 내 존재가 실재하는지에 대해 갈구하고 있다. 결론은 남자를 소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연애를 하고 있다는 뻔하고 재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와 같은, 이 괴로운 외로움과 악수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단지 지구에서 나고 자란 털 난 짐승들은 모두가 겪고 있을 고독함일 뿐이라고. 그러니 우리, 또다시 내 살점을 갖다 바치는 허무한 희생을 반복할지 언정 우리를 미워하지 말자고. 차라리 그런 우리의 바보 같은 점마저도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사랑만큼은 무지하게 하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사랑 없이는 무용한 하찮은 존재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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