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신약
주사 한 번에 60억 원, 세계 ‘혁신신약’ 90조 원 시장 쟁탈전, 제2의 ‘애브비’ 가능할까?
중증·희귀질환 치료에서 큰 역할을 하는 치료수단 중 하나는 ‘혁신신약(First in class·세상에 없던 신약)’이다. 과거 치료 방법이 없던 병들도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된 약의 등장에 완치를 바라보고 있다. 네덜란드 제약사인 ‘메루스’의 비(比)소세포폐암 치료제 ‘비젠그리’가 지난해 1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혁신신약으로 승인받아 환자들의 희망이 된 게 대표적이다. 이런 신약의 치료 기회가 환자들에게 제대로 주어지려면 세계 시장에 출시된 치료제가 국내에서 허가를 받고 급여 청구권까지 안착돼야 한다.
그러나 미국제약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2~2021년 세계에서 처음 출시된 뒤 1년 내 국내로 진입한 신약은 5%다(비급여 도입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신약 도입 비율은 18%다. 협회는 한국에서 신약이 급여를 받기까지 평균 약 3년 10개월이 걸린다고도 분석했다. 국내환자는 건강 보험 급여로 신약치료를 받기 위해 4년여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신약 도입 속도가 OECD 평균보다 느린데 대해 의료계에선 의견이 엇갈린다. “혁신신약을 지원하는 정책이 부진해 고비용으로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가 많다”는 의견과, “신약의 안전성 검증은 엄격해야 하고 건강보험의 곳간 열쇠를 영리기업에 넘겨선 안 된다”는 견해가 맞선다.
기업들이 개발한 혁신신약의 초기 비용 상당액은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비로 충당되고 있다. 이에 약값의 어디까지 제약사 몫으로 봐야 할지를 두고 비판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업체들의 고삐 풀린 약값 책정은 계속되는 중이다. 일례로 루게릭병의 일종인 변색성 백질이영양증 주사제 ‘렌멜디’는 가격이 425만 달러(약 62억 원)다.
더 싸게 만들 순 없나? 비싼 약 상위 15개는 희소질환용
일본 기업 쿄와기린이 소유한 영국 바이오사 오차드테라퓨틱스의 유전자치료제 ‘렌멜디’처럼 혁신신약이어야 값을 천정부지로 올릴 수 있어 세계적인 기업들은 초고가 신약 개발로 연구개발(R&D) 중심 추를 옮기고 있다.
FDA 허가를 받은 약품 중 가격 기준 상위 15개는 혁신신약이자 희소질환 치료제다. 1~6위는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겨냥한, 한 번만 맞으면 되는 유전자치료제이기도 하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스트레이트 리서치에 따르면 혁신신약 시장은 지난해 248억 달러(36조 원)에서 2033년 621억 달러(90조 원) 이상으로 커질 전망이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처럼 혁신신약에 집중하는 이유는 뒤따르는 경쟁사 없이 장기간 시장 독점권을 가질 수 있어서다.
혁신신약의 상당수가 희소질환 치료제인 이유는 각국 정부가 관련 치료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약값을 협상하기 때문이다. 개발비를 직접 주거나 세제 지원, 신속 심사 제도 등의 혜택을 주는 영향도 적지 않다. 미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미국은 희소의약품 R&D에 약 40%의 세제 혜택을 준다. 기업 입장에선 희소의약품이 임상시험만 넘기면 비싼 약값으로 일반의약품보다 더 오래 수익을 낼 수 있는 셈이다.
신약 개발 패러다임 바뀐다, 인류 구원할 바이오 혁신신약 기술은 무엇인가?
기업들은 이런 고수익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신기술을 신약에 적용하는 데 적극적이다. 종전 최고가(350만 달러)인 혈우병(출혈성 질환의 일종) 치료제 ‘헴제닉스’, ‘베크베즈’는 체내에 유전자치료제를 주입할 때 유전자전달체로 사용하는 아데노연관바이러스를 활용했다. 적혈구 증후군 치료제인 ‘카스게비’에는 유전자 편집기술(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이 적용됐다. 미 버텍스 파마슈티컬스가 개발한 이 약의 가격은 220만 달러(32억 원)다.
최근엔 우주가 제약·바이오산업을 바꿀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에 필요한 대규모 기술 인프라도 신약의 값을 끌어올린다. 해외 대형 제약사들 외에 국내 중견 기업인 보령과 신생 기업 ‘스페이스 린텍’이 이미 우주기술 융합에 나섰다.
이처럼 비싼 신약 위주로 개발되는 딜레마를 없애고 약값 인상에 제동을 걸기 위해 각국은 움직임을 가시화했다. 미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미국은 2022년부터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오리지널 의약품보다 값이 싼 바이오의약품 복제약의 장려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백악관에 의하면 이 법으로 내년부터는 당뇨병 약인 ‘파르시가’의 약값이 68% 내려간다. 이를 포함해 10개 의약품의 값이 인하될 예정이다.
이런 세계적인 약들은 하나만 개발해도 회사를 순식간에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시킬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자가면역치료제인 미 애브비 ‘스카이리치’의 지난해 3분기 매출은 32억 달러(약 5조 원)다. 하지만 제약 유통 전문 업체를 제외한 선두주자의 연 매출이 연결 기준으로도 4조 원을 갓 넘은 한국 기업들로선 신약 개발을 위한 투자가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2023년 한국식품의약품안전처의 국산 신약 허가는 ‘0건’에 그쳤다. 지난해엔 절치부심해 FDA 혁신신약까진 아니지만 중소기업들이 각각 1건을 올려 회복의 기미를 알렸다. 온코닉테라퓨틱스가 개발한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자큐보정’과 비보존제약의 비마약성 진통제 ‘어나프라주’다. 뒤를 이을 후보로 종종 거론되는 것은 LG화학이 개발 중인 통풍 치료제 ‘티굴릭소스타트’다.
다만 적지 않은 국내 중소 업체들은 신약 개발의 첫 단계인 환자 모집조차 쉽지 않다. 지난 17일 '지아이이노베이션'에 따르면 신약후보물질(GI-102) 임상(2a상)을 위해 40여 명의 환자를 모집하려 했지만 한 명도 모집하지 못했다. 다른 물질(GI-108)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회사 측은 “충분한 항암 활성이 없으면 임상시험 환자 등록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며 “환자 모집을 위한 신규 기관을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호주에도 개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아이이노베이션은 본격적으로 2a상에 돌입했으며 한국과 미국 11개 사이트에서 환자 모집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 '이코노믹리뷰' 기사 인용함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