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의 추억
일이 있어 모처럼 일본 땅을 밟으니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연수 시절, 그리고 가라오케.
'가라오케(カラオケ)'는 일본어 '가라(空: 비다)'와 영어 '오케스트라'의 합성어이다. 대학 4학년 때 처음 들었던 이 말은, 지금은 우리말 '노래방' 정도로 번역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가라오케'가 더 익숙한 단어다.
일본에서 연수를 받던 시절, 현지 상사들과 처음 가본 가라오케. 기계 반주가 나오고 악보를 보며 노래를 부르던 단순한 시스템은 곧 화면에 가사와 배경 영상이 나오는 세련된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로선 신기하고 이국적인 경험이었다. 한국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일본어로 부르던 그 순간, 나는 문화의 현해탄을 넘나들고 있었다.
기숙사 룸메이트와 근처의 가라오케에 갔던 일, 어학연수 시절 친구의 누나가 운영하던 가라오케 가게에서 목청껏 한국 노래를 부르던 기억, 그리고 귀국 후 일본 손님 접대를 위한 단골 코스로 다녔던 가라오케...
당시 문화는 1차는 갈비, 2차는 가라오케 코스였다.
88 올림픽 시절부터 외국인 접대가 늘어나면서 가라오케는 거의 매주 출동하는 공식 코스가 되었다. 그곳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언어의 벽을 허물고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연수 후 귀국한 후배의 환영회에서 들른 회사 뒤편 가라오케 '蘭'이 생각난다. 익숙한 공간, 친숙한 사이에서 불현듯 찾아온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만난 낯선 이가 일본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왔다.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고 안경이 깨졌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 36 바늘을 꿰매고,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썼다. 작은 렌즈 조각은 그대로 눈 근처 피부 속에 남았다. 애꾸눈이 된 채 출근하던 아침, 내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같이 어울리던 회사 동료들은 같이 경찰서에 가서 증인이 되어주느라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일부는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도 동행해 주었다.
가해자는 20대 초반의 젊은 회사원이었다. 형사는 합의를 권했지만, 안경을 가격한 행위는 살인미수에 해당한다고 했다. 결국, 흉악한 브로커를 앞세운 위협을 받은 끝에 치료비와 안경값 60만 원만 받고 합의해 주었다. 형사는 최소 300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귀띔해 주었지만 그럴 수가 없던 분위기였다.
시름시름 혼자 자취방에 누워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 주었고, 아버지는 편지와 전화로 위로를 해주셨다.
검사의 부름을 받고 난생처음 검찰청사를 방문했을 때, 가해자는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나는 그의 구만리 같은 앞길이 안타까워 석방에 동의해 줬다.
이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 사건은 큰 상처로 남았지만 상처 부위는 봉합되었고, 다행히 그해 겨울에 결혼도 했다.
한창 일하던 시절에는 접대나 회식하러 가라오케에 갈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었다. 하지만, 고객이 원하고 나 또한 노래를 좋아하니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종도 맥주에서 폭탄주로 바뀌며 도우미도 등장했다.
중국으로 발령 나니 'KTV'라는 이름으로 가라오케가 존재했다. KTV는 Karaoke + TV의 약자였다. 동남아 곳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간판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 그곳을 드나들며 다시 노래를 불러댔다. 노래 부르기와 탬버린은 언제나 스트레스를 푸는 해결책이었다.
코로나19 창궐 기간에 퇴직을 한 이후 가라오케나 노래방에 갈 기회는 거의 없어졌지만, 여전히 추억만은 선명하다.
작고하신 회장님은 2차로 노래방을 꼭 들러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분이었다. 덕분에 나도 한국 가요부터 일본 노래, 중국 노래, 오페라 송, 팝송까지 부르며 마음껏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시절이 그립다. 같이 얼싸안고 노래 부르던 그 사람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울리던 몇몇은 벌써 이 세상을 하직했건만...
가라오케는 내게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니었다. 웃고 떠들고 스트레스를 풀며 일과 우정이 연결되던 삶의 무대였다.
일본 상사가 처음 데려간 가라오케 바에서,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 한국 측 임원들이 입사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기가 내 신원을 보장하겠으니 꼭 회사에 남아 기여해 달라고 말했다. 그 진심 어린 부탁은 가라오케라는 공간에서 오갔다. 그때 그 대화가 없었더라면, 한 곳에서만 35년도 넘게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라오케.
비록 아픈 추억도 있었지만, 그곳은 언제나 내 감정을 해소해 주던 무대였다.
다시 그 시절처럼 노래를 부르고 싶은 밤이다.
*이미지: 구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