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코스 기행문
한라산은 몇 번을 올라봐도 늘 새롭다. 계절마다, 코스마다, 날씨마다 얼굴이 바뀐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6월 초, 영실코스의 철쭉은 ‘한라의 봄’이라는 말이 왜 붙는지 실감하게 한다.
전날 밤, 친구부부가 애써 준비한 바다낚시 체험 이벤트의 여운이 가시자마자 아침 일찍 일기예보에서 ‘맑음’이라는 말을 확인하였다. 등산 전문가 친구가 권유한 한라산 영실코스 등반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얼른 준비물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등산화가 없어도, 스틱 없이도 오를 수 있는 한라산 영실코스 도전이 오늘의 이벤트였다. 왕복 4시간 코스라면 아마튜어라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한라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중에서 영실코스는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하니 쉽고, 또 풍경도 가장 멋지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다고 한다.
평일 오전이라도 한라산 영실 입구의 1 주차장은 대한민국에서 170번째 부지런한 이에게만 허락되는 공간이었다. 2 주차장에 겨우 차를 세우고 2.5km를 걸어서 1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것은 산행보다 더한 고행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사실 영실코스보다 이 전초전이 더 힘들다고 한다. 다만 팁을 드리자면, 점심 먹고 13~14시 전후에 도착하면 정상에서 하산한 사람들 덕분에 빈 공간이 생겨 주차가 훨씬 수월하다. 하계 입산은 15시까지 가능하니 시간은 충분하다.
영실 탐방로는 해발 1,280m에서 출발한다. 입구부터는 소나무 숲길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어 몸을 푸는 데 그만이다. 그러나 곧이어 계단과 밧줄로 이어진 고행이 시작된다. 1400m 지점에 이르니 중국 커플들이 지쳐서 몸을 맞대고 쉬고 있었다. 아마도 등산을 포기하나 보다.
하늘이 탁 트인 구간에 오르니 붉은 병꽃과 쥐똥나무 향이 양옆으로 반긴다.
곧이어 나타나는 600미터 오르막 구간. 이른바 천국에 오르기 전에 겪는 ‘마(魔)의 구간’이다. 숨이 차오르고 햇살은 뜨겁다. 6월 오후의 산행은 덥고, 자칫하면 탈수 증세까지 겪게 되지만, 그 순간마다 펼쳐지는 절경이 쉼표가 되어 준다. 날씨가 좋으면 마라도까지 아득하게 보이는 행운도 누린다고 한다.
1500m 근처에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데 친절해 보이는 어느 하산객에게 물었다. "도대체 철쭉은 어디 있다는 말이오?" "아, 조금만 참으세요. 1시간만 걸으면 천국이 보인답니다!"
오아시스 같은 감언(甘言)을 듣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무거워진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이 오르막 고비를 넘기면 천국 같은 평원이 기다린단다.
아! 드디어 구상나무 숲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숲엔 아픔이 깃들어 있구나. 기후변화로 고사한 고목들이 허연 뼈처럼 서 있었다. 무심코 스쳐 지나칠 수도 있는 풍경이지만,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우리 후손들이 마주할 미래가 이 숲보다 밝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구상나무의 존속과 영원함을 두 손 모아 기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윗세족은오름'. 백록담의 어깨 아래, '윗세누운오름'까지 이어지는 철쭉 능선이 장관이었다.
항상 밑에서 바라볼 때 삿갓을 쓴 듯한 백록담 화구벽이 바로 눈앞에 떡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진짜 내가 한라산에 올랐음을 실감하였다.
2025년 6월 11일 현재 철쭉은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천상의 기쁨’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진홍빛 융단이 능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고,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괴석들이 그 장면에 신화를 더한다.
오르는 길에서 마주치는 기암괴석 바위들은 전설 속 설문대할망이 쌓아 올린 오백장군으로, 설법하던 석가여래의 영산(靈山)을 닮았다고 하여 이곳을 ‘영실(靈室)’이라 부른다. 구름이 흘러들면, 정말 그 바위들이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병풍바위라는 이름처럼, 누군가 이 철쭉 능선을 감싸 안으려 기다란 병풍을 펼쳐놓은 것만 같았다.
하산 코스를 어리목 방향으로 택하면 영실코스보다 1km 길고, 돌길이 많아 조심스럽다고 한다. 나는 오른 길을 따라 다시 내려왔다. 5시가 되니 입산 통제가 시작되어 관리인은 더 이상의 등산객을 저지하며 하산을 재촉하였다.
내려오는 동안에도 한라산은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이 산은 단순히 높거나 험해서 위대한 게 아니다. 사계절 내내 그 속에 깃든 생명과 신화, 그리고 우리 마음의 산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정상에서 마신 물 한 모금은 천상의 맛이었다. 쓰레기통도, 매점도, 화장실도 없는 이 길이었지만,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두고 온 듯한 뜻깊은 산행이었다.
영실의 바람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자연의 품에 안겼다.
고사목 앞에서 멈춰 선 침묵, 철쭉 능선 위에서 터져 나온 감탄, 그리고 전설 속 오백장군과 함께한 시간들, 그것이면 충분했다.
6월의 한라산을 즐기려면, 영실코스 등산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