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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있는 곳에서

마라도 기행

by 글사랑이 조동표

세상의 끝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까지 차를 몰아 일부러 내려가기도 했었다. 애들이 아직 어린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지도 속에서 늘 가장 아래쪽, 이름마저 작게 인쇄된 외딴섬.

대한민국 땅의 마지막 지점인 마라도.

그러나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시작처럼 느껴졌기에 꼭 가보고 싶었다. 이미 장성한 애들은 분가해서 없기에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제주 송악산 앞, 산이수동에서 배를 탔다.

장마를 알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항구엔 고요한 긴장이 감돌았고, 파도는 아무 말 없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단한 신분 확인 후 배에 오르자, 멀어지는 송악산과 바다 위로 솟은 형제섬이 뿌연 빗줄기 너머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 뒤로 허연 안개구름 모자를 쓴 산방산이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가파도를 지나며 마라도로 향하는 동안, 문득 고개를 돌려 어제를 떠올렸다.

영실코스로 한라산 정상에 올랐던 땀의 흔적들.

날씨만 맑았더라면, 이 배 위에서 한라산의 실루엣을 다시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아쉬움은 내 눈동자 어딘가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가파도의 등대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마라도에 닿자,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건 사람도 간판도 아닌 비바람이었다.

바람이 옷깃을 밀고 들어오며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소.”

그 인사에 응하듯 모자챙을 깊이 눌러쓰고, 우비를 입고,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비에 젖은 섬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섬은 단출했다.

나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고, 풍경은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정직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해가 떠도 그늘이 없을 섬은 속일 수 없는 마음처럼 투명하였다.

방풍꽃에 둘러싸인 검은 현무암은 수천 년을 거쳐 이곳에 뿌리내린 얼굴들이었고, 파도는 그 얼굴을 어루만지듯, 때로는 몰아치듯,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내 마음도 그 풍경을 닮아갔다.

무심한 듯 단호한 섬의 표정 앞에서, 조금씩 무장을 풀었다.

삶에서 그토록 집착해 온 것들이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음을, 그 바람이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다.

길 한편, 지금은 문을 닫은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가 홀로 서 있었다.

작고 조용한 교정.

그러나 교실 안엔 아직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이 섬에서조차 한때 누군가는 자라났고, 꿈을 꿨고, 그 꿈은 어딘가로 흘러갔겠지.

잠시 그 시간의 잔광 앞에 멈춰 섰다.

길목마다 '마지막 횟집' '최남단 민박' ‘마지막 짜장면집’이라는 간판들이 해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섬 전체가 작은 유머를 지닌 진지함처럼 느껴졌다.

나는 ‘별장식당’이라는 집에 들어가 짜장면과 짬뽕을 시켰다.

면 위엔 갓 따온 톳이 얹혀 있었고, 국물에선 바다 냄새가 살짝 묻어났다.

마라도의 남쪽 끝, '대한민국최남단' 기념비 앞에 섰다.

그곳에서 바라본 수평선은 길고 조용했다.

저 멀리 오키나와가 있다고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검푸른 물결만 펼쳐져 있었다.

그 무한한 잔물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의 끝이란, 이렇게 고요하고 따뜻한 것일 수도 있구나.

무엇을 성취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바라보고, 느끼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순간이었다.

섬에는 교회도 있었고, 성당도 있었고, 절도 있었다.

신(神)의 이름이 무엇이든, 이 섬에서는 모두가 한 하늘 아래 숨 쉬는 것 같았다.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앞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등대 조형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어떤 등대는 우아했고, 어떤 등대는 장중했다.


그중에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 등대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멀고도 험한 여정의 끝에 서 있는 등대.

그 앞에서, 나도 내 삶의 작은 희망 하나쯤은 다시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팔미도 등대는 나지막하지만 묵직하게 서 있었다.

언제나 길을 밝혀주던, 익숙하고도 믿음직한 불빛처럼.


이 섬에선 이질적인 것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짜장면과 폐교, 종교와 과학, 바다와 사람... 경계란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마음의 선에 불과한 건 아닐까.


주민들이 해신제를 지낸다는 '장군바위'를 바라보았다. 묵묵한 바위와 침묵의 바다가 함께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세상의 끝이란 실은 내 안의 시작을 다시 마주하는 곳이라는 것을.

돌아오는 배에 올라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다시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으로 들어가기 전, 내 마음 어딘가엔 아직도 마라도의 바람 한 조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 바람은 나직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끔은 멈춰도 괜찮아.

삶은, 너를 기다려주니까.”


백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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