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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수월봉

물 위에 뜬 달을 따라 걷다

by 글사랑이 조동표

제주도 서쪽 끝,

바다와 하늘의 경계에 작은 봉우리가 있다.


이름하여 영산수월봉(靈山水月峯).

영적인 산, 물 위에 뜬 달, 그리고 그 봉우리.

어떤 설명도 이 이름보다 더 시적일 수 없다.


- 가장 낮고, 가장 깊은 산


해발 77미터.

눈앞의 능선은 낮고 완만하다.

그러나 이 산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영산靈山’이라는 이름은 아무 곳에나 붙지 않는다.

수월봉은 제주의 서쪽을 지키는

묵언의 수호자다.


폭발한 화산재가 바다와 섞이며 쌓였고

그 위에 다시 마그마가 솟아올랐다.

18,000년 전의 지층이 지금도

절벽 위에 오롯이 남아 있다.

억겁의 수월봉은,

지질이 아니라 기억의 산이다.


- 지오트레일, 시간의 피부를 걷는 일


수월봉을 따라 이어지는 지오트레일은

바람과 시간, 침묵과 풍경이 함께 걷는 길이다.


걸음을 옮길수록,

나는 점점 더 ‘지금’이 아닌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수천 년의 흔적이 발끝에 느껴지고

내 안의 번잡함은 한 겹씩 벗겨진다.


수월봉을 걷는 일은

산을 오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 물 위에 뜬 달, 수월(水月)의 깨달음


‘수월(水月)’은

물 위에 비친 달처럼

닿을 수는 없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상징이다.


마음의 평온,

진실한 삶,

조용한 기쁨.


이 모든 것은

손으로 움켜쥐려 하면 흩어지고

그저 바라볼 때 가장 선명해진다.


수월봉의 이름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선문답이다.


- 왜 이 길을 걷는가


기업을 경영한다는 건

늘 결과와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그래서 자주 숨이 찬 오늘.


그럴 때 나는 수월봉을 떠올린다.

바람에 깎인 절벽,

시간이 포개진 지층,

물 위에 떠 있는 달빛 같은 고요.


그곳에서는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연이 먼저 알려준다.


- 수월봉, 마음이 쉬는 자리


수월봉은 높지 않다.

그러나 그 안의 깊이는

산보다 오래된 바다처럼 넓고 묵직하다.


지오트레일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질문을 잊고, 해답도 내려놓는다.

그저 걸음만이 남는다.


달빛은 물 위에 비치고,

바다는 묵묵히 시간의 비밀을 간직한다.


그 조용한 산길 위에서

내면의 흔들림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영산수월봉.

이 산은 풍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제주 서쪽 끝, ‘영산수월봉’이라는 이름 아래 걸어본다. 낮은 오름 위에서 마음은 더 깊어지고, 바람과 시간이 나를 정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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