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사용의 문제를 짚다
하차는 있는데, 승차는 없다니!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자주 듣는 표현이 있다.
"누구누구, 프로그램 하차."
방송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슬쩍 궁금해진다.
처음 나올 땐 왜 ‘승차했다’고 하지 않을까?
출연자는 언제 승차했는지도 모르게 하차만 한다.
출연이란 단어는 멀쩡히 있으면서, 왜 유독 떠날 때만은 '하차'라는 비유어를 쓰는 걸까.
‘하차’는 원래 차에서 내리는 동작이다.
그러니까 '여정'이라는 은유 속에서, 함께 가던 사람이 중도에 내린다는 느낌일 테다.
하지만 애초에 출연자는 승객이었던가?
제작진의 기획과 대본 안에서 움직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것으로 정리된다.
우리는 단순한 사실보다 분위기 있는 말을 좋아한다.
‘하차’는 ‘그만둔다’보다 좀 더 부드럽고, 덜 직설적이며, 왠지 품격 있어 보인다.
일종의 ‘완곡어법’, 미화된 표현이다.
잘려도 하차, 스스로 그만둬도 하차.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만드는 말.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누가 ‘입직’했다는 말은 없다.
‘입각’, ‘입성’, ‘진입’ 같은 거창한 단어들이 쏟아진다.
마치 무협지나 대하드라마처럼.
어디 성문을 들어가는 듯, 천하를 얻는 듯한 분위기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어딘가 피곤하다.
그냥 출연하고, 그만두면 안 되나?
출근했다가 퇴근하듯, 들어와서 나가면 되는 걸, 굳이 드라마를 만들고, 서사를 덧붙이고, 비유를 덧칠해야 할까.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도구인 동시에, 감정을 조율하는 장치다.
때론 완곡한 표현이 필요하고, 서사적인 문장이 힘을 발휘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수사가 일상의 ‘정직한 감정’들을 흐릿하게 만든다면, 이젠 누군가는 물어야 한다.
“도대체 어디서 탄 거지? 왜 내릴 때만 저렇게 요란한 거지?”
언어의 쓰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의미나 용례가 왜 그렇게 정착되었는지를 되짚어보는 태도는 꼭 필요하다. 특히 다음 두 가지 사례는 우리말의 정밀함과 그 무심한 변용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1. ‘서식(棲息)’의 남용
‘서식’은 본래 동물이 일정한 곳에 깃들어 살아감을 뜻한다.
한자 ‘서(棲)’는 깃들다, ‘식(息)’은 숨 쉬다, 생존하다는 의미.
즉, 숨 쉬며 깃들어 산다는 뜻이니 동물의 활동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요즘은 식물에도 “서식한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마치 “소나무가 이 산에 서식한다”는 식인데, 사실 식물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자생(自生)하거나 자라거나 생장(生長)하는 존재이다.
“소나무가 자생한다” 혹은 “자란다”가 맞는 표현이다.
아마도 “식(息)”이라는 글자가 ‘식물(植物)’과 어감이 유사해 착각하는 경우도 있겠고, 또는 전문가조차 정확한 용례보다는 언어 흐름에 타협하는 현실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언어의 정밀성이 무뎌지는 것이고, 동물과 식물의 존재적 차이를 무시하게 되는 셈이다.
남녀가 서로 바뀔 수 없는 것처럼, ‘서식’과 ‘자생’도 구분되어야 한다.
2. ‘재원(才媛)’의 오용
‘재원(才媛)’은 원래 재능 있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재(才)’는 재능, ‘원(媛)’은 미모와 교양을 갖춘 여자를 뜻한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우리 아들은 하버드에서 수학한 재원이야”라고 했다면, 그건 마치 “우리 아들은 재색겸비한 규수야”라고 말하는 셈이다.
말하는 이는 칭찬한다고 했겠지만, 사실은 어법상 어긋난 표현이다.
이런 사례는 한자를 생경한 외래 문자로만 여기고, 뜻을 깊이 음미하지 않은 풍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는 외워서 쓰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익혀 쓰는 것인데 말이다.
- 마무리하며
언어는 그 민족의 정신이고 삶의 방식이다.
한자의 뜻을 알고 쓰면 훨씬 풍부하고 정밀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걸 외국 문자처럼 거리 두기 시작하면 말의 깊이는 점점 얕아진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오용이 실은 우리가 얼마나 언어를 도구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일지도 모르겠다.
남녀가 서로 바뀔 수 없듯, 식물과 동물의 표현도 구분돼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말을 아끼고 다듬는 일, 곧 삶을 존중하는 태도이기도 하겠다.
언어는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
더 말하고 싶어서 비유하고, 덜 말하고 싶어서 돌려 말한다.
그러다 보면, 말이 삶보다 더 극적이 되어버릴 때도 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언어라는 ‘차량’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