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미래를 잇는 기호들
장 미셸 바스키아
- 과거와 미래를 잇는 기호들, 그의 언어
토요일 오후, 서울 DDP 뮤지엄에 들어서자 벽 가득한 글자와 기호들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이라는 제목처럼, 이번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특별전은 단순한 회화 전시가 아니라 그의 예술 언어를 탐험하는 여정이다.
바스키아는 20세기 후반 뉴욕을 대표했던 천재 화가다. 27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그는 음악, 스포츠, 만화, 인종, 자본을 화폭에 끌어들였고, 이미지와 언어를 뒤섞으며 억압과 불평등에 저항했다.
그의 언어는 난해하면서도 직설적이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질서를 만든다.
- 거리에서 시작된 언어
전시는 그의 초기 작업실이었던 뉴욕의 거리를 먼저 보여준다.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SAMO©’라는 이름으로 남긴 그라피티(낙서처럼 그리는 거리 미술)에는 사회와 제도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불안과 범죄, 경제 위기로 뒤엉킨 1980년대 뉴욕의 공기는 그의 캔버스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그와 비슷한 세대였던 나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긴장과 불안을 떠올렸다. 정치적 억압, 급격한 산업화의 그림자,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저항과 자유의 언어. 비록 장소와 시대는 달랐지만, 억눌린 현실을 뚫고 나온 목소리라는 점에서 바스키아의 낙서와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묘하게 겹쳐진다.
- 기호와 상징의 확장
캔버스를 넘어, 바스키아는 나무판자와 종이 위에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는 전사와 영웅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변용해 저항과 회복력을 담았고, 아프리카 가면과 해골 모티프를 차용해 정체성과 권력, 인종 문제를 드러냈다. 만화와 어린이 그림 같은 단순한 선은 소비문화와 대중문화를 비튼 풍자가 되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단어와 기호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핵심 언어였다. 「Words and Signs」, 「Temple of Words」 섹션에서 보듯 그는 책과 신문, 광고 문구를 차용해 새로운 문장을 만들고, 때로는 단어를 지워버리며 ‘언어의 신전’을 세웠다.
나는 여기서 내 일상의 언어를 돌아보게 된다. 무심코 던지는 말, 기록해 둔 문장, 혹은 아직 꺼내지 못한 생각들. 그것들 속에도 나만의 ‘기호’가 있고,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저항이나 위로, 혹은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숨겨진 기호와 해부학
바스키아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상징과 기호가 층층이 숨어 있다. 반복되는 단어와 이미지들이 서로 다른 작품을 연결하며 혼란과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가 남긴 8권의 공책에는 온갖 메모, 낙서, 시구, 만화 같은 그림이 담겼다. 기이하게 보이는 상징물(왕관, 해골, 천막 등) 들에 그의 천재적 영감이 녹여져 있다. 유치해 보이지만 제각기 의미가 있는 드로잉이다.
또한 그의 해부학적 표현은 단순한 의학적 묘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취약함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 이후 선물 받은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은 그의 예술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삶의 상처가 때로는 가장 큰 창조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바스키아의 해부학 이미지는 내 마음에도 깊게 파고든다. 나 역시 돌이켜보면, 실패와 상처의 순간이 삶을 다시 세우는 기초가 되었던 적이 많았다.
- 마지막 불꽃
말년의 작품에서 바스키아는 삶과 죽음, 혼돈과 질서의 경계를 탐구했다. 「Riding with Death」 속 자신은 해골 위에 올라탄 존재로 그려졌다.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았던 그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그의 동료 파브 파이브 프레디는 이렇게 말했다.
“장 미셸은 불꽃처럼 살았다. 불은 꺼졌지만, 아직 열기는 남아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우리 인생 또한 결국은 크고 작은 불꽃으로 남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오래 타오르고, 또 어떤 이는 짧게 타올라도, 중요한 건 남긴 흔적의 깊이일 것이다.
- 전시가 남긴 울림
이번 전시는 바스키아의 70여 점 작품과 함께 한국·아시아 문화유산을 나란히 배치해, 그의 언어가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전시장을 나서며 이런 질문을 안고 왔다. “나의 언어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기호를 남길 것인가?”
바스키아가 남긴 낙서와 기호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언어이자, 미래와 이어지는 흔적이었다. 우리 또한 저마다의 방식으로 언어를 남기며, 그 흔적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