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의 현장
강남역 미아 4장 6화
충돌의 현장
회의실 스크린에 본사 자료가 떴을 때, 그는 이미 이 회의가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표 안의 숫자들은 단정했고, 문장은 깔끔했다.
문제는 그 깔끔함이 현장을 한 번도 거치지 않은 언어라는 점이었다.
본사 임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시아 전 지사는 이번 분기부터 동일한 기준으로 집행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상회의 화면 속 중국 지사장이 손을 들었다.
“기준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일정은 현장에서 실행이 어렵습니다.”
본사 임원이 고개를 들었다.
“왜 어렵습니까? 이미 다른 지역은 적용 중입니다.”
중국 지사장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답했다.
“여기는 승인에 시간이 걸립니다.
의료진 일정, 학회 일정, 지방 정부, 상무국, 시와 성 정부 승인까지 겹칩니다.
속도를 맞추려면 규정을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들으며 메모장에 한 줄을 적었다.
'속도를 올리면 규정이 흔들리고, 규정을 고정하면 시장이 늦어진다.'
1. 본사의 논리
본사 쪽 화면이 다시 전환되었다.
이번엔 내부감사팀장이었다.
“그래서 표준을 세우는 겁니다. 현장 상황이 다르다는 이유로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통제는 무너집니다.”
내부감사팀장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표준, 통제, 책임.
그 세 단어가 회의실 공기를 지배했다.
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통제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통제가 현장의 실행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본사 쪽에서 시선이 모였다.
“표준은 결과를 관리하지만, 현장은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합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 기준은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이 방식으로는 현장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 시장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2. 현장의 반발
이번엔 필리핀 지사장이 말을 이었다.
“본사 기준을 따르면, 경쟁사는 이미 계약을 끝냅니다.”
본사 임원이 즉각 반박했다.
“경쟁사가 규정을 어긴다면 그건 경쟁사가 책임질 문제입니다.”
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현장에서 보면, 규정을 지킨 쪽이 늘 책임을 집니다.”
그 말은 회의실을 잠시 얼어붙게 했다.
그는 그 문장이 현장의 진짜 언어라는 걸 알고 있었다.
3. 사업부장의 개입
그때, 사업부장이 처음으로 마이크를 켰다.
“지금 이 논쟁은 누가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네.”
모두가 화면을 바라보았다.
“본사는 기준을 세워야 하고, 현장은 시간을 다뤄야 한다.”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문제는, 우리가 기준을 너무 빨리 명령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일세.”
그는 그 말이 이 회의의 핵심이라는 걸 알았다.
4. 번역자의 자리
회의가 끝난 뒤, 옆에서 잠자코 듣기만 했던 회장이 그에게만 따로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본사는 기준을 지키고 있고, 현장은 살아남으려 합니다.”
회장은 웃었다.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거지.”
그는 그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번역자는 언제나 양쪽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5. 결론 없는 결론
결국 결정은 유예되었다.
본사는 가이드라인을 유지했고, 현장은 적용 속도를 조정하기로 했다.
문서에는 이렇게 정리되었다.
‘현지 상황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적용한다.’
그는 그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기업은 늘 문장으로 타협한다.
그리고 그 문장을 실제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일은 언제나 현장의 몫이었다.
6. 에필로그
퇴근길 강남역.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둥둥 떠다녔다.
그는 2호선에 올라 잠시 맞은편을 응시하다 마음속으로 하루를 정리했다.
도쿄 지하철만큼 복잡한 수도권 노선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각자의 노선을 타고 목적지로 향하지만 가는 길에 환승도 해야 종착역에 도달한다.
본사와 아시아 현장도 목적은 하나였다.
수비나 공격 모두 회사를 위한 일이었다.
본사와 지사의 충돌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 조직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다음 회의 일정을 확인했다.
또 다른 충돌이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이미지: 구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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