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업무, 남겨진 사람, 남겨진 해석
강남역 미아 제2부 3장 1화
- 남겨진 업무, 남겨진 사람, 남겨진 해석
1. 알람 없는 아침
본사에서 아무도 와주지 않은 폐업 회식이 자체적으로 끝난 다음 날, 그는 알람 없이 눈을 떴다.
출근할 필요는 없었지만 몸은 본능처럼 먼저 깨어났다. 베개 옆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밤사이 온 메시지는 없었다. 화면은 조용했고, 그는 잠시 그 침묵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침.
그것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문득 '헤어진 다음날'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2. 비어 있는 일정
그동안 그의 아침은 늘 누군가를 위한 준비였다.
회장 컨디션, 법인장 출근 여부, 본사의 분위기, 회의 일정, 방문 인사, 저녁 자리.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넥타이를 맬 이유가 없었지만 손은 익숙하게 매듭을 만들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잠시 눈을 껌뻑였다.
회사에서 풀려난 것은 맞지만, 회사 습관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었다.
3. 방향을 기억하는 몸
집을 떠나 거리로 나오자 평일 오전의 강남역이 그대로 반겨주었다.
사람들은 바쁘게 건물을 드나들었고, 그는 처음으로 그 흐름 밖에 서 있었다.
이제는 누구의 일정도 맞출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예전 회사 쪽을 향했다. 그러나 중간쯤에서 멈춰 섰다. 이제 그곳에 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안녕하세요... 저... 회장님 지인 OO인데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연락하지 않았지만, 회사 밖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려면 아직도 그의 번호를 거쳐야 했다.
그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끝난 것은 직함뿐이었다.
4. 건물 밖의 회사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생각했다.
회사는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 남는다.
그가 떠난 조직은 여전히 그의 하루를 호출하고 있었다. 출근은 끝났지만 일은 끝나지 않았다. 역할은 이름을 잃었을 뿐 계속되고 있었다.
5. 남겨진 사람들의 방문
며칠 뒤, 핸드폰이 울렸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카페 입구에는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혹시 회장님 가까이 계셨던 분 맞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말했다.
“네, 제가 오래 함께 일하긴 했습니다.”
남자는 서류봉투를 꺼냈다. 한 달 전 날짜가 찍힌 계약서였다. 그는 문장을 훑어보았다. 내용보다 형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결론을 미루고 책임을 남기지 않는 구조. 회장의 방식이었다.
“아마... 결정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 말은 설명이었고 동시에 번역이었다.
6. 질문의 반복
그날 이후에도 연락은 이어졌다.
지인, 거래처, 예전 직원.
질문은 늘 비슷했다.
“그분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결국 하려던 게 뭡니까?”
그는 곧 깨달았다. 사람들은 사실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묻고 있었다. 그리고 의도는 늘 그가 대신 설명해 왔던 것이었다.
그는 어느새 같은 문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결정이라기보다 유보에 가까웠습니다.”
“아마도 타이밍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말은 점점 자연스러워졌지만 확신은 줄어들었다.
7. 서로 다른 회장
같은 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한 명은 먼저 퇴사한 임원이었고, 다른 한 명은 해외 주재원이었다.
“회장님 덕에 제가 버텼죠. 늘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또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굉장히 계산적인 분이었습니다. 인정은 손톱만큼도 없었죠.”
같은 사람을 말하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사람은 행동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각자가 필요했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누군가에게 회장은 보호막이었고, 누군가에게 회장은 통제였을 것이다.
8. 해석자의 자리
밤이 되자 그는 수첩을 펼쳤다. 누가 무엇을 물었고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적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회장과, 사람들이 듣고 돌아가는 회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설명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결국 사실처럼 남는다.
회사에 있을 때 그는 보고서를 썼다.
지금은 사람을 쓰고 있었다.
회장의 행동이 아니라 의미가 남고 있었고, 그 의미는 그의 문장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9. 직함 없는 직무
불을 끄기 전 그는 생각했다.
퇴직한 줄 알았지만 업무 형태만 바뀐 것이었다.
예전에는 회장을 대신해 회사를 설명했고,
지금은 회사를 대신해 회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직함은 사라졌지만 직무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이제 그는 임원도, 비서실장도 아니었다.
해석자였다.
10. 마지막에 남는 사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복잡한 인물을 기억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차가운 사람, 의리 있는 사람.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 문장을 만드는 사람이 마지막에 남는다.
강남역 밖으로 밤 열차가 지나갔다.
사람은 떠나지만 설명은 남는다.
그리고 설명하는 사람은, 끝내 퇴직하지 않는다.
*이미지: 구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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