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가 먼저 건 전화
강남역 미아 제2부 3장 7화
퇴직자가 먼저 건 전화
1. 명함 상자
그날 밤 그는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퇴직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것.
명함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회의실의 공기, 술자리의 웃음, 어색한 악수의 온도까지 떠올랐다.
그동안은 항상 누군가 먼저 전화했다.
본사, 거래처, 파트너, 부하 직원.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전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걸어볼까.
2. 망설임
손이 멈췄다.
전화를 건다는 건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퇴직자가 먼저 연락하는 순간, 힘의 균형이 바뀐다.
예전에는 회사의 이름으로 말했지만 이제는 오롯이 개인이었다.
그 차이가 낯설었다.
3. 첫 번째 전화: S2
가장 먼저 떠오른 건 S2였다.
거칠어 보였지만 속이 깊었던 동료.
전화벨이 몇 번 울렸다.
“어, 선배야?”
익숙한 목소리.
“요즘 어때?”
잠깐의 정적 뒤에 웃음이 터졌다.
“퇴직하고 나니까 선배가 더 바빠 보이던데?”
그는 웃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적응한다.
그의 부재에 대해서도 그랬다.
4. 두 번째 전화: N
N은 여전히 같은 톤이었다.
차분하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목소리.
“잘 지내십니까?”
그 한마디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짧은 안부 끝에 N이 말했다.
“가끔 본사에서 당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직은 자신을 잊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5. 세 번째 전화: Y
Y는 여전히 직선적이었다.
“지금 사업을 생각 중이십니까?”
안부보다 질문이 먼저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Y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시간 지나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틀림없어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는 왜인지 그 말이 예언처럼 들렸다.
6. 걸지 못한 번호
H.
손가락이 멈췄다.
왜인지 모르게 아직은 망설여졌다.
승진이 뒤집히던 밤의 공기,
회의실의 침묵.
시간이 흘렀어도 그 장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화면을 닫았다.
모든 관계는 동시에 시작되지 않는다.
7. 예상 밖의 전화
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U였다.
“오랜만입니다,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우연치고는 이상한 타이밍이었다.
“어디 얼굴 한번 봐야죠.”
짧은 말이지만 그는 반가웠다.
권력으로 연결된 관계는 끊어졌지만, 사람으로 연결된 관계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8. 변화의 순간
그날 저녁, 그는 조용히 앉아 창 밖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었다.
몇 통의 전화.
아무것도 특별한 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의 대화는 누구의 지시도 아니었다.
누구의 이해관계도 없었다.
처음으로, 그 자신이 선택한 시도였다.
9. 깨닫는 것
권력 안에서는 관계가 기능이었다.
그러나 권력 밖에서는 관계가 사람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인간관계의 시작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10. 다음 문장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아직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S2, N, Y, U.
그리고 아직 누르지 못한 이름 하나.
H.
그는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모든 전화에는 순서가 있다.
그리고 다음 순서는 아마 가장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었다.
*이미지: 구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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