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강남역 미아 제2부 3장 8화

H와의 만남

by 글사랑이 조동표

강남역 미아 제2부 3장 8화

- H와의 만남


1. 결국 누른 번호


며칠을 망설였다.

휴대폰 화면 속 H의 이름은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예전이었다면 그가 먼저 전화를 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신호음 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오랜만이네.


2. 어색한 인사


만남은 생각보다 빨리 잡혔다.

강남역 근처의 작은 카페.

예전 같으면 호텔 라운지나 회의실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아무 의미 없는 공간이었다.


H는 먼저 와 있었다.

정장은 아니었고, 넥타이도 없었다.

그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3. 달라진 거리


“잘 지내고 있는가?”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조용히 지냅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예전 같으면 업무 이야기로 바로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누구도 먼저 방향을 잡지 않았다.


권력이 사라지자 대화도 방향을 잃은 것 같았다.


4. 말하지 않은 밤


그는 결국 물어보지 않았다.


그날 밤.

승진이 뒤집히던 회의.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이미 오래전 일이었고, 답을 들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H도 설명하지 않았다.


조직에는 설명되지 않는 결정들이 있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 H의 한마디


커피가 반쯤 줄었을 때 H가 말했다.


“그때... 많이 힘들었지?”

의외의 말이었다.


그는 잠시 웃었다.

“다 지나간 일이지요.”


H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도 쉽진 않았네.”


그 문장에 그는 처음으로 H를 인간으로 보았다.


6. 같은 구조 안에서


그는 늘 H를 ‘선택된 사람’으로만 봤다.

하지만 H 역시 같은 구조 안에서 움직였던 사람일 뿐이었다.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멈춘다.

그것이 꼭 개인의 승패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7. 사라진 직함


대화는 느리게 이어졌다.

회사 이야기,

건강 이야기,

요즘의 일상.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생각보다 말할 것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8. 마지막 질문


헤어지기 직전, H가 물었다.

“다시 일할 생각은 없는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 대답에 H는 웃었다.

“그게 답일 수도 있겠지.”


그는 막강한 권력자였던 H가 그의 퇴직에 대해서 본사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애써 억눌러 참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9. 강남역의 공기


밖으로 나오자 저녁의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회의로, 술자리로, 다음 일정으로.


오늘만큼은 걸음이 느렸다.


H가 말했다.

“그래도... 한 번씩 연락하게. 자네 생각이 많이 나더군...”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형식적인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10. 돌아서는 순간


지하철 입구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춰서 생각했다.

권력 속에서의 관계는 늘 긴장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권력 밖에서는 사람이 남는다.

그리고 오늘, 그는 처음으로 H를 사람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라 로카 공작의 초상: 프란시스코 데 고야(1795년). 청력을 상실한 고야가 그린 '말하는 초상화'. H가 연상되었던 그림.
keyword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글사랑이 조동표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고, 인간다움을 찾으며,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미래의 삶에 공헌하며, 행복하게 살기.

724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8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3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