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사랑이 거봉 Mar 24. 2024

강남역 미아 5장 5화

오너와 CEO_CEO H_2

   H와의 대화는, 고령에서 비롯된 부정확한 표현과 영어와 일어, 우리말이 동시에 섞여 나오기도 하였다. 시공을 초월하는 표현, 느닷없는 외국사람 이름 등, 여간해서는 직원들이 알아듣기 어려웠다.


   일찍부터 귀가 단련되어 눈치가 빨랐던 P는 대략적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어서 별문제 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직원들에게 P가 대변인으로 설명을 해줘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보통 3년 주기로 여비서들이 바뀌었는데 그녀들은 H의 독특한 어법에 익숙해지기까지 꽤나 애를 먹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도 심해서 한번 척을 지게 되면 외면해 버려 쉽사리 회장실을 노크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결재도 지연되었다. 일주일도 더 걸리는 H의 먼 나라 출장이 이어지다 모처럼 출근을 하게 되면, 검은색 결재판을 옆구리에 끼고 발을 동동 구르는 여직원들이 많았다. 


   모든 경비를 아시아사업부에서 타서 쓰는 회사의 재무보고는 마감일을 어길 수가 없었으니, 당연히 기한 내 결재가 엄수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최종결재자 얼굴을 보기가 어려우니 한꺼번에 결재가 몰리기 마련이었다.


   경리팀 직원들은 주간 조회석상이나 인트라넷을 통해 결재서류 제출 마감일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지만, 직원들 문제라기보다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딸 수 있었다. H의 출근일이 언제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게다가 직원들 역시도 출장이 잦았기에 어떤 경우에는 서로 엇갈려 2주 이상 못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출장이 잦은 이 조직에서는 출장보고서와 정산서, 영수증 첨부가 필수제출 세트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모든 서류에 최종결재자 서명 없이 제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리팀에서 아이디어를 내어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하였지만, 정작 H는 그런 시스템을 이용할 줄 모르기도 했거니와 반드시 본인 손으로 서명하려고 하였다. 21세기에도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다고 한다면 바로 사람의 고집일 것이다.


   세계적인 갈라파고스 나라이자 아날로그를 숭상하는 일본의 재무팀 역시도 수기(手記) 서명을 신뢰하여, 이 문제는 좀처럼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 보면 권력이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H는 보통 어느 특정일을 잡아 결재를 몰아서 해줬는데, 큰 이슈가 있거나 이쁨 받는 직원이 회장실에 들어가면 1시간도 더 걸렸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3분 만에 끝이 났다. P는 1분 만에 결재를 받고 나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임했다. 회장실에서 길게 잡담을 나눌 겨를이 없었다.


   H와 따로 저녁식사를 하는 나까마(동아리) 그룹이 있었는데, 거기에 끼고 싶어 하는 직원들은 이제나저제나 부름을 받을까 눈치만 보았지만 그 공고한 문이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나까마 그룹의 간사장은 P였기에 항상 식사자리의 선정과 멤버 결정에 머리가 아팠다. 매번 같은 얼굴로 같은 곳만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H는 소식(小食)을 했고, 식성도 까다로운 편이었다. P는 H가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 점심만 되면 오늘은 누구랑 어디서 회동할지 안을 짜내고 H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어쩌다 P에게 "오늘 자네는 참석하지 않아도 되겠네"라는 전갈을 비서로부터 받으면 뛸 듯이 기뻐서 저녁이 있는 삶을 만끽하거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강북에 나가곤 했다. 그러나 꼭 그런 날일수록 H의 변덕에 의한 비상호출을 받았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집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다 전화를 받고서 급히 택시를 집어타고 회사 근처 식당으로 회귀한 적도 있었다. P의 아내는 방금 차린 된장찌개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물끄러미 식탁을 응시하며 입술을 지그시 일자로 꽉 깨물었을 것이다.


   P는 주중에는 '회사인간'이었지만 주말만큼은 골프도 안 치며 가족서비스에 열심인 모범가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회사인간이라 할지라도 늦은 시간까지 사람을 모시는 일, 잦은 비즈니스 교류, 끊임없이 어어지는 술자리의 삶은, 그가 꿈꾸던 이상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접대와 교제는 큰 비중의 업무였으며 P는 이 방면에 이골이 나기도 했지만,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그런 자리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해외에서 손님들이 내방하는 빈도가 높다 보니 저녁식사를 함께 해줘야만 하는 일정이 늘 이어졌다.


   대부분의 저녁은 P가 응당 나가야 할 접대자리라기보다는 H가 주관하는 자리에 동석하여 그를 보좌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손님도 신경 써야 하고, 메뉴도 골라야 하고, H도 모셔야 하는 삼중부담이었다.


   아마도 80대에 그렇게 정정하게 살면서 원거리 해외출장을 옆집 다니듯 다니고 저녁마다 연회를 즐긴 샐러리맨 CEO는 세계적으로 손꼽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네스북에 올려야 된다고 난리였다.


   H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이면에는 P의 헌신적인 백업이 있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비즈니스 상 만나야 될 유명대학 교수들,  본사나 아시아사업부, 그리고 아시아 각 지사의 관계자들은 늘 H의 근황을 파악하거나 약속(단순 만남부터 식사까지)을 잡으려면 P에게 먼저 연락을 해왔다. 비서는 항공권 예약이나 호텔과 레스토랑 수소문, 회의 진행이나 일정관리가 주 업무였다.


   P는 아침부터 귀가할 때까지 쓸개를 서랍 속에 넣어두고 아예 열쇠를 잠가두고 살았다. 어차피 비위를 맞춰야 사는 인생, 쓸개는 두었다 어디에 쓸 것인가? 한마디로 간도 없고 쓸개도 없는 삶이었다.


   사람들은 H가 P를 고생시키면서 제대로 보답도 안 해준다며 뒤에서 쑤군거렸지만 누구도 선뜻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A가 부여한 P의 생사여탈권을 H가 쥐고 있다고 했으니 말로 꺼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끔 신경이 예민해진 P가 반항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때때로 H는 P에게, "자네에게 더 잘해주고 싶지만 저 바다 건너에서 허락을 안 해준다네"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며 넘어가곤 하였다. 


   점잖았던 H도 언젠가부터는 마케팅만 할게 아니라 진짜 장사꾼이 되어야겠다며 실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비슷한 시기부터 P에 대한 립서비스도 많아졌다.


   예컨대, '너를 양자로 생각한다, 지금 타는 차를 물려주겠다, 갖고 있는 선물 중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주겠다, 머지않아 승진을 시켜줄지 모른다' 등등 뭔가 큰 보따리를 안겨줄 것처럼 말을 했다. 철저히 근원을 알 수 없는 미확인 정보로 혼란스럽게 미끼를 던져가면서, 한 해 한 해를 넘겨갔다. 노련한 H는 심리전에도 능해서 허탈해하는 P에게 사람을 붙여서 속을 떠보게 하거나 따로 술자리를 만들어 달래주기도 하였다.


   매년 두 번씩 있는 인사평가 인터뷰는 매우 형식적이어서, H는 전혀 관계없는 화제를 끄집어내거나 저녁에 누구랑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화제로 삼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H는 인사니 평가니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아무리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P는 어느 날부터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던 후배들보다 연봉이 낮아지는 수모를 맛보아야 했다. 그 옛날 P손을 거쳐 뽑은 후배들이 연봉에서 앞서 나가자 이것 또한 청출어람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존심 강한 P에게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이것이 몸을 바쳐 H에게 헌신한 대가란 말인가?


   P는 연말연시, 주주총회, 아시아사업부장 방문일마다 가슴을 졸이고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이제나저제나 큰 거 한방을 노렸지만 H는 도통 12년간 권좌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H가 가장 아끼는 후배인 S대의대 출신 교수와 셋이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 교수가 약간 취해서 속내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 P 역시도 그 교수와는 20년도 넘게 막역하게 지내오며 여러 자문을 받기 위해 자주 만난 친한 사이였다. 그는 H를 수십 년간 헌신적으로 모셔온 P에게 이제는 정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소리를 높였는데, 이를 들은 H는 아무 말 없이 눈만 꿈벅거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H가 어떤 사람에게는 통 큰 성의표시를 하였다고 들었지만, 유독 P에게만큼은 인색하였다. 아마도 P가 직장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 자체를 다 자기의 배려로 여기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꼬박꼬박 급여를 지불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이었을까?


   어느 날 H의 막강한 후견인이었던 A와 T가 갑작스럽게 타계하기 시작하면서 H가 한국인에게 자리를 승계할 기회를 놓쳐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일본인 사업부장은 한국 법인의 법인장을 겸직해 버렸다. 이것이 아시아사업부의 서울 2중대가 시작되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H는 법인장에서 내려오자 곧바로 짐을 싸서 제2의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때부터 의 잔재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가끔씩 국제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건강을 확인하는 정도였는데, 별안간 떠난 지 1년이 다 될 즈음 H가 서울로 돌아온다는 연락을 해왔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임대한 아파트에서 쭉 생활했었다. 재입국하면서는 강남역을 못 잊었는지 P가 근무하던 사무실 근처에서 호텔생활을 시작하더니 장기투숙자로 눌러앉았다. 호텔에서 레지던스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아들과 서양 며느리는 마음씀씀이가 H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나 보다. 아무리 시민권자라 해도, 미국에서 노년의 홀로서기는 더 고독하고 갑갑했었으리라. 한국에서 만큼 받들고 모셔주는 말동무가 있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다시 돌아온 H를 위해 P는 월 2~3회 정도의 만남을 기획하였다. 예전의 멤버들을 규합하여 식사자리를 마련하였으나, 이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점심식사 위주로 편성하였다. 어쩌다 H를 저녁에 만나고 싶어 하는 지인들이 연락해 오면 세팅을 하긴 했는데 예전만큼 음주를 못하였으니 도통 흥이 나지가 않았다.


   좋아하던 폭탄주도 한잔이면 끝이었다. 당연히 노래 부르는 문화도 사라졌다. 90살을 넘기고, 일이 손에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더니 기력도 쇠잔해지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코로나19까지 수년간 기승을 부려대니 만남 자체도 수월하지 않아서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는 날이 많아졌다.


   H는 P와 충성스러운 부하직원 N(4장 3화에 등장)의 도움으로 비자를 갱신하여 6년 넘게 지내다 작년 3월에 덜컥 코로나에 감염되어 투병하기 시작했다. P는 H에게 같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자고 재촉했지만, 본인이 의사라서 역병을 더 잘 알고 있다며 레지던스 룸에서 나오지 않았다. 노인의 고집은 여전하였다.


   P는 전북죽이나 갈비탕을 준비하여 호텔을 방문하고 안부를 살폈지만 상태는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H는 그 누구보다 자기 몸은 자기가 더 잘 안다며 한사코 병원 가기를 거부하고 자가치료를 계속하더니, 3개월 만에 외출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햇살이 따가워진 6월부터는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도 만나기 시작하여 P는 안심하고 긴장을 풀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P가 오사카에 갔다가 공항에서 항공편을 대기하던 중이었다. H의 안부가 궁금하여 문자 연락을 했더니 이상한 사진이 전송되어 왔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국제전화를 걸었더니 H는 간신히 기어 나오는 목소리로 자신의 위급함을 알렸다. 탑승 전 겨우 N과 연락이 된 P는 H를 119에 태워 큰 병원 응급실로 옮기도록 부탁하였는데, 간신히 서울 시내 대학병원을 잡아 입원을 하게 되었다.


   직접 원인은 코로나 투병 여파로 발생한 하체부실로 인한 낙상이었다. 게다가 폐렴까지 발견되어 중증 쇠약단계였다. 결국 대학병원과 요양병원을 전전하다 3개월 만에 파란만장하고 화려했던 인생을 쓸쓸히 마감하고 말았다. 너끈히 100세를 넘길 줄 알았던 그 건강했던 H가 병마를 못 이겨내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97세였다. 백신을 다섯 차례나 맞았지만 면역력이 약한 고령자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H가 낙상하여 꼼짝도 못 하고 힘들었던 순간 번쩍 떠오른 두 단어가 있었다는데 그것은 '고독사'와 '불가항력'이었단다. 그리고 위급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P였다는 말을 남겼다.


   평생 의료에 공헌하며 살아온 H였지만 마지막에 제대로 된 의료의 혜택을 받아보기나 했을까? 요양병원은 전혀 그런 곳이 아니어서 아마도 거기서 병세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H가 입원하고 전원(병원 옮기기)을 3번이나 했을 때 P는 보호자 노릇을 해가며 폭우나 땡볕을 뚫고 병문안을 다니고, 입퇴원 수속도 밟아가며 119에 동승하기도 하였다. 가족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국내외의 지인들에게 병세를 알리자 여기저기서 내방객들이 면회를 요청하였다. 대학병원의 병문안은 정해진 시간 외에는 만날 수도 없고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음성으로 확인되어야 병실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일본부터 중국, 미국, 유럽까지 여러 나라에서 H를 만나러 지인들이 입국하였다. 방문객들과의 연락도 P의 몫이었고, 면회부터 식사까지 챙겨줘야 했다. P는 막 자리 잡기 시작한 비즈니스에 연일 바빴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병원 내방객들 뒤처리도 해줘야 했다.


   H는, 은퇴 후 회사를 창업하여 새 출발을 시작한 P에게 큰 선물을 하나 해주겠다고 하더니, 선물을 주기는커녕 마음의 부담만 잔뜩 안겨주고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마지막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계속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어서 제대로 된 유언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 큰 유감이었다. 그것은 P와 정을 떼려는 과정이었을까?


   P는 입관할 때 H를 마지막으로 만났지만 독한 약물투여의 여파로 몸이 부어있었다. P는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H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직도 P는 H를 꿈에서 만나고 있다. 항상 정갈한 감색 싱글 정장 차림에 흰 와이셔츠, 노란색 넥타이를 맨 모습으로 등장하여 미소를 짓거나 뭐라 말씀하신다. 아직도 못다 한 말이 많으신 모양이다.


   이제는 부디 편히 쉬소서...

이전 21화 강남역 미아 5장 4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