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가 30년을 섬긴 H, 그가 노욕(老慾)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더 일찍 한국인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과욕으로 말미암아 물실호기를 자초하였으니 두구 두고 아쉬운 일이다. 세대교체 타이밍을 놓친 바람에 결국 본사의 아시아사업부 책임자(일본인)가 법인장을 겸임하면서 P의 회사는 표면적으로 일본인이 직접 경영하는 체제가 되어버렸다. 물론 한국 내에서의 경영은 P에게 권한이양이 되어있었기에 큰 결정사항만 빼면 자율권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법적인 책임자인 법인장이 일본인이냐 한국인이냐 하는 것은 중요 의사결정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안건이었다. H가 생전에 조금만 깊게 생각해서 판단만 잘했어도 모두가 윈윈(Win Win)을 할 수 있었던 게임이었다.
각설하고, P는 H를 처음 만난 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P가 입사한 1987년 봄이었는데, P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감색양복에 흰 와이셔츠,노란색 넥타이를 맨 중년의 신사가 갈색 가방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한눈에 사무실 스크리닝을 마친 듯한 얼굴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P를 바라보며 “여기 일본 지사장은 어디 있나?”라고 물어왔다. P는 “지사장은 지금 오사카에 있습니다”라고 답하며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내 이름은 H야, 난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모처럼 서울에 들렀기에 한번 와봤네”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젊은이는 누군가?”라고 되물어서, P가 간단한 인적 사항과 입사 경위를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앉아서 이것저것 더 물었다.
그가 체재한 시간은 10분 정도였지만 상당히 강렬한 인상이었다. 당시 P는 한국인이 미국에서 본사의 일을 돕고 있다는 사실과,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어디선가 뿜어져 나오는 고상한 기품이 서린 중년 신사를 처음 만난 사실이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기에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일본인 지사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그냥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H는 1927년에 강원도에서 태어난 부잣집 아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논과 밭을 바라보면 끝이 안 보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선박도 갖고 있어서 H는 청진이나 나진에 살던 유년시절 기억을 더듬기도 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일어를 배우고,청소년기에 일본에 유학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일본인 가정교사를 두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연구 총괄책임자였던 Y의 추측이었다. 왜냐하면 같은 또래의 어르신들에 비해 이상하게도 일본어를 유창하게 잘하였다. 그리고 P는 단 한 번도 H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H는 6.25를 거치면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미국에서 결혼도 하고 대학과 기업에 몸담았던 시민권자였는데, 영어 일어를 다 잘하였으니 오너 A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A는 원래 일본인을 스카우트하여 미국 비즈니스를 전개하려 했다. 연구 분야는 적임자를 찾았지만 라이선스 등 비즈니스 담당은 적합한 일본인을 발견하지 못하여 여러모로 검토 끝에 H가 낙점되었다는 후문이었다.
H는 미국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한국에서 유학이나 교환교수, 장기연수 등으로 미국에 건너가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어려움에 처한 의학계의 후배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이는 그의 커다란 인맥 자산이 되었다. 훗날 한국에 만들어진 신설 회사가 대관업무나 마케팅, 영업을 해나감에 있어 연고가 없는 일본인 경영자가 힘에 부칠 때, H에게 신세를 진 후배들을 적시에 활용하여 어려움을 해결해 주곤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지사장뿐만 아니라 오너 입장에서도 은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큰 능력이었다. 심지어 오너 A는 H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존경의 의미를 내포하며, 사회적으로 성공한 연배의 분들에게나 적용된다.
H의 생일은 새해 초반인 1월 중순의 시작이었고 항상 2주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때를 맞춰 본사의 CEO였던 T를 위시한 사절단과 연구 프로젝트 책임자들, 중국 지주회사 동사장과 의약품회사 총경리, 한국 지사 사장과 임원 등, 한중일 수뇌부들이 모여 축하연을 벌여주었다. 이들이 다 같이 한 날에 겹쳐서 연회를 갖기도 하였고, 각각 다른 날을 잡아서 서울에 오기도 하였는데 거의 매년 필수 참석자들이 정해져 있었다.
그의 생일 전후 일주일간은 비공식적인 생신 주간으로 선포되어 요일 별로 다양한 사람들과 식사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새해벽두부터 해외에서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기획을 담당했던 P와 H의 비서, 그리고 총무부서는 의전관계로 몹시 분주하게 움직이던 연례행사였다.
P는 의전 준비(공항픽업, 동행자 배정, 숙소, 일정 등)와 식사 메뉴 결정, 동선 확보, 2차 장소까지 항상 사전에 점검을 해야 했다.손님들과 헤어질 때까지 용의주도하게 케어를 해야만 했다. 비서실과 총무, 기획, 마케팅, 인허가업무담당자들까지 거의 전 사원들이 긴장하면서 매일매일 의전을 치러냈다.
H는 주인공이었으니 지시만 하였고, 기획과 실행, 그 뒷감당과 수습은 언제나 P의 몫이었다. P는 그림자처럼 움직여야 했던 가게무샤(影武者) 이기도 했다.
기억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끄집어내어 보기로 한다. 언젠가는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강남역 거리는 젊은 인파로 출렁이고, 일찌감치 업무를 마치고 회사에서 빨리 퇴근하려던 P를 H가 식사나 같이 하자며 붙잡았다. 연말이라 늦게까지 근무하던 CFO도 합류하여 셋이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H는 신년 초에 있을 본인의 생일축하연을 어디서 어떻게 거행할지 화두로 삼았다. 생일파티는 주로 한정식 집이나 한우 고깃집에서 이루어졌다.
H는 날짜 별로 연회 초청자와 식사장소를 상의하고 지정하였다. 그리고 연초에 연락하면 실례이니 연말에 미리 약속을 잡아놓도록 요청했다. 그 지시에 따라 P는 연회 날짜를 픽스해 놓도록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약속을 받아놓았다.
새해 들어 H와 업무점검을 하던 차에 축하연에 대해서도 체크하던 중, 느닷없이 H는 말을 바꿔 자기가 언제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했느나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동석했던 CFO를 증인으로 내세웠지만 막무가내였다. 무엇에 심기가 불편했는지 모르지만 새해 벽두부터 일이 꼬인 것이다. 난감해진 P는 한 명씩 연락해서 일일이 사과를 해야 했는데, H는 P와 CFO가 서로 짜고서 자기를 따돌리고 있다는 의심까지 하였다. 남에게 의심받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기던 P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전혀 인지장애 증상은 아니었다.
변덕과 의심이 심한 권위주의자 H로 인해 P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려니...' 했다. 그래야만 직장에서 버틸 수 있었으리라.
오너 A는 와인을 즐겼지만 H는 조니워커 블랙을 스트레이트 잔에 넣어 맥주잔에 잠수함처럼 투하해서 마시는 전통 폭탄주를 좋아했다. 이는 P가 의대교수들을 접대하며 배운 스킬이었는데 어느 날 H 앞에서 제조하여 선을 보였다. H는 폭탄주의 맛과 제조하는 재미에 쏙 빠져 자신이 주도하여 석 잔씩 돌리고 흥에 겨우면 일본 엔카를 불러 젖혔다. 늘 노래방에서 그의 16~18번까지 같이 합창하는 것은 추종자들의 기본 의무였다.
H는 본인이 선호하는 이너서클(내부그룹)을 따로 만들었다. P를 중심에 세우고 이너서클을 통제하며 조직을 장악했다.
일찍 상처(喪妻)하여 저녁이 외로웠던 H는 해외출장을 가거나 접대, 회식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늘 식당에서 외식으로 저녁을 때웠다. H는 토종 한국음식만 좋아해서 해외 행사에 나갈 때마다 현지에서 한국식당 찾는 것은 P의 임무였다. 저녁을 먹으면 꼭 노래 세 곡은 뽑아야 직성이 풀렸는데, 풍류를 좋아하는 선비였다고나 할까?
H는 나이에 비해 젊고 지적인 풍모에 세련된 패션 감각을 지녔다. H의 마음을 사야 승진도 하고 연봉이 올랐던 여직원들은 그의 패션 감각을 칭송하느라 호들갑을 떨었다. 기분이 좋아진 H는 맛있는 식사를 사주며 흐뭇한 마음을 표시해 주었다. 여직원들은 결재를 받으러 회장실에 들어가면 30분은 기본으로 머무르며 자신을 어필하기 바빴다. 회장실을 나설 때는 다들 득의만만 한 얼굴의 최진사댁 딸들이었다.
H는 P의 패션을 보며 감각이 뛰어나다고 칭찬해 주면서, 본인은 즉시 그것을 업그레이드해서 모방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P의 남방셔츠가 멋있으면 일단 칭찬을 해놓고 그다음 주에 비슷한 분위기의 고급 브랜드를 사서 입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쇼핑할 때도 P를 데리고 가서 옷 고를 때 조언을 듣고, 같이 따라와 준 대가로 양말이나 넥타이 또는 셔츠를 사주었다. 오래전에 비싸게 샀지만 입지 않는 옷을 주면서 재활용해서 입으라고도 하였다. 반대로 P가 갖고 있는 것이 좋아 보이면 뺏어간 적도 있었다. 적어도 한 세대는 젊게 살려고 노력했던 신사였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생활이 단조로우나 H는 버라이어티 하게 살았다. 늘 바쁜 해외출장에 젊은 직원들을 가까이하며 살았으니, 이것이 그를 오랫동안 장수하게 한 비결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 A가 뒤에서 돌봐준 덕택이었다
일반적인 직장에는 엄연히 정년이란 게 있는데, 왜 60살 전후에 은퇴를 시키는지 P는 요즘에서야 이해를 하고 있다. 몸도 마음도 머리씀씀이도 기억력도 업무 능력도, 다 때가 되면 녹이 슬고, 용도폐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60살이 넘어서도 길게 직장에서 현역으로 일한다는 것은 후진들의 길을 막는 처사이고, 조직의 신진대사에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관대하게 생각해서 70살까지는 인정해 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오너 A가 살아있을 때는 워낙 글로벌 이미지가 강했던 H를 특별대우해 주었다. H는 A의 핵우산 아래 특수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이었기에 90살까지 현역에서 롱런할 수 있었다.
P는 H가 왜 그렇게 권력과 명예를 갈구하며 때로는 사람을 희생시키고 억누르며 이용하기도 하면서 살아갔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과연 노욕이란 두 글자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H는 괴물이었을까?
본사에서는 H를 불사조라고 부르며 여전히 현역임을 질투하는 임원들이 많았다. H가 오너의 특별한 비호 아래, 글로벌 거점 회사를 본인의 플레이 그라운드로 여기며 출근했는지 그 속을 알 길은 없다. 어쩌면 H도 오너처럼 황제같이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80세가 넘어서도 젊은 직원들과 똑같이 호흡하며 살았던 그 대단한 분이, 자기만을 위하지 않고 P에게 약간의 배려만 해줬어도 영원히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으리라 회고해 보지만, 그것은 무리였을까?
P가 중국에서 돌아와 아시아사업부에서 일했던 12년간, 단 한 번도 본인 손을 대고 코 풀지 않았고, 절대로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화려하고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 H를 위해서 소리 없이 온갖 역할을 도맡아 수행해야만 했던 P 같은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환경이었다.
자신의 노화를 억제하려고 소식도 하며, 젊은 사람들을 가까이하면서 늘 웃는 얼굴, 점잖은 삶, 마지막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들은 분명 삶의 긍정적 요소였을 것이다.
H는 자기가 P를 키웠다고 생각했고 자기 덕에 P가 생존했다고 여겼던 듯하다. 오너가 차갑게 등을 돌리면서 H에게 “P의 앞날은 당신에게 맡길 테니 알아서 하시라”라고 했다며 본인이 P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음을 암암리에 과시했다. P는 꼼짝없이 H의 포로가 된 기분이었고, 그 한마디를 빌미로 P의 손과 발을 묶어두었던 것이다.
P가 헤드헌터의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며 회사에 남아 있았던 것은 그의 집에서 만류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고생만 죽어라고 했던 중국 생활을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 리벤지를 꿈꾸며 와신상담한 각오도 작용하였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H가 P의 목줄을 쥐고 밀땅을 거듭하고 있었다.
가끔씩 원망이 들기도 하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이자 시대의 산물이었다. H와 P는 언뜻 부자관계처럼 다정해 보이기도 했지만, 기실은 애증의 관계였다고나 할까?
97세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하직하던 날, 화장과 장례식까지 뒤처리를 해주고 영원히 작별을 고했던 P의 고단함을 알기나 했을까?
이미 은퇴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직장 부하로서 상사에게 예우를 다하는 자세를 당연시한 H와 그 아들들의 태도는 어이가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화장터에서 H와 완전히 작별을 고하고 아들들하고도 이별할 때 그네들은 "Thank you Mr. P!" 단 한마디였다. 아마도 그 부자(父子)들은 미국식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H의 골분은 그의 부인 옆에 묻혔다. 그가 생활했던 미국 북동부에서 가족장을 치르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어떤 스님이 얘기하기를, 예전에는 매장을 했기에 망자의 DNA가 유골 속에 남아 있어 구천을 맴돌기도 하고 꿈속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요즘은 화장을 하고 골분조차 자연에 뿌려 사라지게 하니 돌아가신 분들이 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였다. 하지만 P는 요즘도 꿈속에서 H를 종종 만나고 있으니 반드시 고승의 말씀이 맞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오너 A와 그의 아들, T와 H를 포함한 여러 CEO들은 다 제각각 자기들 개성대로 살아왔고 이 사회와 의료에 공헌도 많이 했지만 그들도 역시 똑같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조직에서 여러 형태로 P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서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친한 대화상대가 되어주기도 했으며, 험한 직장 세상에서 샐러리맨의 삶을 일깨워준 길잡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으며 사라진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가 기업을 일궈서 고용을 창출하고, 제품을 만들어 의료에 공헌하며 살아온 그 발자취는 앞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가 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