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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Mar 28. 2024

강남역 미아 6장 1화

P가 기억하는 사람들(인맥)

   P가 기업에서 만나 친해졌기억나는 친구들 또는 선후배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특히 뇌리에 남는 사람들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우선 오너 A의 비서 출신들이 여럿 기억난다.


   제일 먼저 만난 Z는 P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걸어 본 일본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겼는데 P에게 처음으로 일본에서 히트한 음료를 먹어 보고 느낌을 알려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것은 "맹물에 미원을 탄 맛 같다"라는 혹평을 하였더니 껄껄 웃으며 나중에 반드시 한국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이 있을 거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대히트를 하였다. 

   Z는 오너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소위 말하는 가방모치(상사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였는데, 헤비 스모커여서 목소리가 탁하였지만 마음만은 맑은 사람이었다. 

   P가 일본을 방문하면 맛집을 순회하며 일본 문화를 알려주려 노력하였다. 당시는 버블경제 시절이었고 본사는 날로 성장하는 시기였는데 하룻밤에 5차를 순례한 적도 있었다. 사다리술(장소를 바꿔가며 술을 마시는 일본식 술문화) 관습을 체험시켜주기도 하였다. 그때그때 다양한 직원들을 대동하여 P에게 회사의 동정을 알리고 직원들과 친해지게 하였다. P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오도록 주선해 줬는데 오사카에서는 신혼부부를 위한 만찬을 베풀어주고 직접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그는 아쉽게도 작년에 타계하고 말았지만 만날 때마다 어깨를 두드려주며 "건강해 보이는구나, 앞으로 잘할 거야!"라며 격려해 준 사람이었다. 한국 총괄 대표를 맡으면서 지금의 한국 지사들을 키워 놓은 수완도 있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인정 많고 따뜻한 충신형 비서였다.


   그 뒤를 이어 비서가 된 사람은 캐나다에서 유학한 여성이었다. 체격도 당당한 미인이었다. 영어를 잘하였고 한국 의약품 시장 조사를 하러 서울에 와서 직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소주를 먹고 기절한 적이 있을 정도로 현지 문화에 동화하려 애썼던 사람이었다. 오너의 옷차림 관리부터 자료 작성, 출장 동행, 통번역을 도맡아 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끝내 오너가 임원 자리를 주지 않자 그의 앞에서 "이렇게 충성스럽게 당신을 보좌했는데 이게 뭡니까!" 하면서 울었다고 할 정도로 당돌하고 당차고 당당하며 자존심 강한 여장부였다. 

오사카의 다다미 방에서 P가 오너와 같이 노래를 불렀을 때 옆에서 박수를 쳐 주며 치어리더 역할을 맡아주었던 기억이 새롭던 실무형 비서로, 늘 밝은 미소를 지닌 분위기메이커였다. 그녀는 은퇴하여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였다고 들었다. 


   또 한 명의 비서실장 O는 호주 지사장을 거친 사람으로 글로벌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P와는 진단시약과 의료기기 프로젝트를 같이 경험한 인연으로 친해졌다. 나이 들어 비서실장을 맡았지만 본사의 해외 비즈니스에 있어서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조언을 한 참모형 비서였다. 그는 오너 살아생전에 계열사의 사장을 또 맡으며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80살임에도 불구하고 의료의 흐름에 안테나를 세우고 정보를 수집하는 노력파였다. P가 창업했을 때 한국 줄기세포 회사와 일본 기업을 연계한 비즈니스를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그만큼 P를 아꼈던 사람이었고 H와는 친구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오너의 임종을 마지막까지 곁에서 지켜본 비서실장 D도 있는데 주군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호위무사였다. 원래 의약품 마케팅 PMM 출신이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자회사의 부사장을 거쳐 다시 본사에 복귀하였다. 오너가 주도하던 한중일 동맥경화연구회 리더를 맡았던 사람이다. 한국 음식과 한국 사람들을 좋아했고 의사들과도 친했다. 곱창구이를 즐겨 먹었다.

   한국의 의료 인프라에 일본의 신약개발 능력, 중국의 넓은 시장을 묶은 스몰글로벌 개념을 오너와 정립한 사람이다. 자신이 잘 아는 의사를 소개해 오너의 투병을 도우며 마지막까지 같이 한 사람으로, 창업가 일가와 매우 유대가 깊었다. 그가 회사를 나간다고 하였을 때 유가족들이 십시일반 자본을 출자하여 그의 회사에 투자를 해 주며 응원도 해주었다.

   오너의 유지를 이어받아 아시아 의료 발전에 공헌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본의 학계에서 나온 seeds를 상업화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오너랑 어떤 대화도 가능했던 비서였고, 암치료기 비즈니스를 소개해주면서 P에게 창업을 권유하여 새로운 길도 열어주었다. 60대 후반에 젊은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며 항상 H의 생일 축하를 해주러 연초에 내한하곤 하였다. H가 타계하기 전에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며 일부러 서울까지 병문안을 왔었다.


   M은 70살이 넘었어도 본사 회장의 비서실장을 10년 넘게 역임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도에서 일했을 때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공부를 시키겠다며 직원들을 데려와 연수를 시키면서 P와 가까워졌는데, 매우 충직한 성품이다. 현재 본사 회장과 같은 70대 중반에 대학교 동기이면서 현역 비서실장이다. 많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겸손하고 정중하며 예의 바른 비서다. 어느 날 P가 생각해 낸 애완견 사업을 논의했을 때 흔쾌히 일본 최고의 회사를 소개해 줌으로써 P의 비즈니스에 또 다른 길을 열어 준 사람이다. H와는 미국에서 같이 일했던 인연으로 각별하게 지낸 사이였고 그의 서거에 장문의 글로 애도를 표한 사람이었다.


   비서들 외에 P가 생각나는 사람으로는 그의 동기인 S1이 있는데, 그는 신입사원 연수 시절부터 알게 되었던 학구파였다. 석사 출신으로 입사하여 P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박사 학위를 따고 P가 맡았던 제품의 학술적 마케팅에 도움을 주었던 친구이다. 미국유학을 하였고 그룹사 연구소 소장도 맡았으며 학술부장도 역임하였다. 학술부 시절에는, P가 중국에 부임하여 발매한 제품이 시장에 도입되었을 당시 중국으로 날아와서 P와 함께 지점을 돌면서 제품교육을 해 주었던 각별한 동기이다. 지금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속 깊은 친구로 검도가 6단이다. 앞으로 노후를 맞이하기 위해서 뭔가 몰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고민하다 본인의 특기를 살려 검도로 정했다고 한다. 장차 한국이나 대만으로 원정 가서 연습도 하고 시합도 하길 꿈꾸는 친구이다. 


   여전히 P와 자주 연락을 하고 있는 S2는 P가 맡았던 제품의 본사 PMM이었다. 처음에는 건방져 보여 별로 상대를 하지 않았지만 알고 보니 의외로 의젓하고 샤프한 사람이었다. 학생 시절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영어를 익힌 유능한 인재로 꼽혔다. 오너와 일대일로 마주하면서 질타를 받아도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PMM이었다.

   S2는 P가 임원이 되었을 때 도쿄에서 대규모 축하연을 열어주며 같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제안을 한 친구였다. 본인이 담당한 제품 출신으로 P가 세계 최초의 임원이 되었으니 축하받아 마땅할 일이라고 하면서 비용도 부담해 주고 몽블랑 볼펜을 선물해 주었다.

   그룹 계열사의 미국 지사장을 지내다 지금은 글로벌 체외진단 혈액검사 회사의 미국 법인의 대표로 일하면서 세계의 의료 발전에 대해서 같이 공감대를 나누고 있는 친밀한 사이이다. H가 입원하였을 때 일부러 서울로 병문안을 와주었다.


   그 외 한국 지사를 거쳐간 일본인들이 여럿 있었다.

   H는 한국 지사에 경리 담당으로 온 사람으로 아직도 독신이지만 직원들과 너무 친했고 정서적으로 한(恨)을 노래한 조용필의 한오백년을 부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이다. 그는 한국 직원들과 유대 관계를 잘 맺었고 회계경리의 기틀을 세워 오너로부터 인정을 받아 태국 사장이 되었다. 태국에서 성공한 후 중국 의약품 법인의 동사장(회장)까지 역임하였다. 본사에서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내부감사실 실장으로 내정하였으나, 남의 뒤를 캐는 일은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그 길로 회사를 관두고 100세에 가까운 노부모를 봉양한 효자였다.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국 여자와 결실을 맺지 못하자 결혼을 단념하였다. 아직까지 독신으로 살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플 뿐이다.


   연재의 서두에 언급했던 한국 지사 마케팅 담당 과장이었던 N이 있다. 그는 부인이 일본 사람이고 일본 국적인 재일교포였다. 약사 출신으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부모가 제주도 출신이어서 지금도 제주도 선산을 방문하고 있다. P가 마케터로 자리를 잡게끔 인도해 준 선배이고, P가 결혼할 때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 500만 원을 꾸어 주었다. 그러면서 아무 때나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 했던 통 넓은 포용력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그 은혜로 P는 N과 형제처럼 교류하며 살고 있는데, 은퇴 후에도 한국에 놀러 오면 반드시 동행을 해주고 있고, P가 일본에 가면 반드시 만나는 사람이다.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윤수일의 '아파트'와 조성모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였다. 항상 유쾌한 선배이다.


   P가 입사한 회사의 사장이었던 Y는 대만 지사장을 거쳐 한국 지사장으로 온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깐깐한 인상이었으나 P에게 지역색깔을 탈피하고 능력을 발휘하라는 격려를 해주며 중책을 맡겨주었다. P에게는 마케팅뿐만 아니라 오너의 지시를 받아 한국신약개발에 공헌하는 역할도 맡겼다. 그는 오너의 명을 받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소신도 강하여 한국 지사를 어떻게 하면 키울 수 있는지 늘 고민하며 직원들과 소통하였다. 브레인스토밍을 하거나 숙제를 미리 내주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 같이 논의하는 걸 즐겨하였다. 타사를 벤치마킹하려 했을 때, 세 품목만 성공하면 회사가 커질 수 있다는 뚜렷한 철학을 갖고 세 개의 기둥제품을 만들자고 외치며, 실제 그 말을 실현시켰다. 한국인은 쉽게 핑계 대는 습관이 있다고 지적하며, 우리 회사는 핑계 대는 영업을 하지 말자는 일침도 가하였다. '배려'라는 단어를 심어 주면서,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회사도 커질 수 있다는 철학적인 이야기도 해준 사람이었다. 대만과 한국을 거쳐 미국과 유럽, 홍콩에서 일하다 일본으로 귀국하여 어느 날 오너와 통음한 후 의료기기 회사의 사장을 맡다가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늦게 피운 재능으로 수채화 화가로 변신하여 요코하마에서 개인 전시전을 열기도 하였다. P는 게이오대학 캠퍼스 그림을 선물로 받아 액자로 만들어 안방에 보관하고 있다.


   이외에 일본인으로서 가까웠던 사람은 아시아사업부에서 친해졌던 여러 동료들이 있다.

   아시아사업부의 사업부장들은 오너의 눈치를 보아가며 권력을 향유하고 각사 사장들을 통솔하는 입장이어서 악역을 도맡아 했었다. P가 처한 환경을 개선해 주고 어려움에서 끌어내주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P를 이용하거나 누르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업부장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못하다.

심지어 어떤 사업부장은 자기가 개를 데리고 아침마다 산보를 한다면서 P가 그런 개가 되면 어떤가 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자기에게 개 같은 충성을 강요한 레벨이 낮은 인간이었다.


   젊은 나이에 사업부장에 올랐던 맥킨지컨설팅 출신의 T나, 과장에서 사업부장으로 깜짝 발탁된 U라고 하는 사업부장도 있었다. 그들은 P보다 젊고, 40세 전에 높은 자리에 올랐기에 P에게 흉금을 터놓으면서 많은 교류를 원하였다. P는 그들과 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경험을 토대로 어드바이스를 하곤 다.

T는 본사를 그만두고 인도에서 개인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다고 들었는데 맥킨지 출신은 역시 다른가 보다. U는 아직도 홍콩 지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외 아시아 사업부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 E나 H, T, M 등이 있는데 그들과는 지금도 랜선으로 연결하여 화상회의를 하면서 얼굴도 보고, 술 한잔씩 마시며 흉금을 터놓는 막역한 사이이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정기적 만남이 있고, 국적을 초월한 단톡방을 개설하여 언제든지 수다를 떠는 친구들이다. H가 입원했을 때는 단체로 서울까지 병문안을 와주었다.


   젊은 나이에 사업부에 들어와 P와 교류하며 친해진 아시아 각 나라의 지사장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어로 '형'이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의 지사장들과는 막역한 사이이다.

필리핀 지사장은 H의 서거에 조화를 보내주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도를 표하였다. 그 외, 호주와 터키, 미얀마 지시장으로는 한국인이 나가있어서 꼭 여행 가서 만나고픈 후배들이다.


   아시아사업부에서 P가 유별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오리지널 의약품을 만들지 아니하고 중국에서 지역 특성에 맞춘 복제약을 만들어 성공시킨 제네릭 회사의 총경리와 총감이 있었는데, 마케터 출신인 H와 T가 있다. H는 순환기, T는 호흡기, P는 소화기를 담당한 경험을 살려 중국 전역에서 치료약 발전에 공헌하자는 결의를 맺은 사이였다. 호형호제하며 지냈고 친동생처럼 P를 도와주었다. 둘 다 P가 한국지사에 근무했던 시절의 우호지점이었던 고베지점 출신들이다.

P가 중국에서 고생했을 때 가장 많이 P를 걱정해 주며 위로주를 사주고 동병상련하였던 사람들이다. 그 둘은 60대 중반이 넘었어도 계열사에서 의료기기와 디바이스 제품을 맡아 일을 하고 있을 정도로 열정이 강한 사람들이다. 친한파들이고 유달리 정이 많다. 중국 험지에서 고생을 같이 했던 유능한 사람들이었기에 P로서는 특별한 정을 나누며 그들과 교류하고 있다.


   연구소 출신으로서 P와 가까웠던 전 세계 연구통괄 임원인 Y1이 있는데, 엊그제 산수(傘壽: 80살) 잔치를 했다. 신약개발연구소에서 소장을 맡고 일하다 오너의 눈밖에 벗어나 한직에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오너로부터 재발탁되어 전 세계 연구소 관련 최고위직까지 올라서 관운이 있는 사람이었다.

S1과 사제관계인 의학박사로 상당히 명석한 사람이었고, P가 모셨던 H와도 오랜 기간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에 유학했을 때 H를 신시내티에서 만난 인연으로 오너에게  추천했다는 일화도 있다.

Y1은 연구에 대한 식견이 남달랐고 한국에 자주 와서 학술교류회를 가졌다. H와 함께 수많은 기초연구 프로젝트를 리드하였다. H가 서거했을 때 가장 슬퍼했던 사람 중에 한 명은 Y였다고 기억된다.


   다른 연구소 출신의 Y2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 약학박사가 되었고 P가 담당했던 제품의 연구 책임자였다. 연구소 출신으로 본사 마케팅 그룹장을 거치면서 임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개혁 의지가 남달랐으며 오너가 많이 아낀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출세하면서 건방져진 태도로 빈축을 사서 회사 내에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매우 핸섬하여 한국에 왔을 때 인기가 높았으며 연구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실적을 남겼다. 그 실적을 마케팅과 학술에 접목시킨 사람으로서 높은 가치를 평가받을 만한 인재이다.


   P가 아시아사업부에서 컴프라이언스와 IT를 담당하면서 만난 친구들도 있다. 그중에서 K와 T 둘과 가까웠는데,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인재들이었다. 처음에는 딱딱한 이미지로만 보였는데 소주에 삼겹살로 친해지고 보니 생각보다 유연한 테크니션들이었다. 둘 다 영어로 소통되는 글로벌 인재들이어서, 전 세계를 망라한 IT 네트워크를 구축한 공로자들이다. P에게는 항상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P가 기억하고 있는 중국인 친구들도 있다. 


   처음에 P가 중국 지사장으로 갔을 때 총경리를 하던 K라는 사람이 있었다. 중국인 K는 명문 선양약대 출신의 약사로서 30대 후반에 총경리에 오른 명석한 사람이었다. 배포도 커서 P에게 중국 생활의 어려움을 물어보며 여러 혜택을 주고자 마음 써주던 사람이었다. 60살까지 총경리와 동사장을 맡으며 일을 했을 정도로 경영수완이 남달랐다. 중국의약집단공사와의 사이도 돈독하였으며, 일어도 잘하여 일본 사람들과 소통에 아무 제약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중국 지주회사 동사장을 했던 M1이 있었는데, 바다거북이족이라고 일컬어지는 인재였다. 저장성 출신으로 미국에 유학하였고, 중국 정부에서 불러들인 사람이었다. 바다거북이는 육지에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고 알려졌는데, 중국에서는 정부에서 영재를 선발하여 육성하고, 미국에 유학시켜서 키운 다음 다시 중국으로 불러들여 조국에 공헌하게 하는 인재를 바다거북족이라고 한다. 그 일원 중에 한 명이었는데, 어느 날 오너가 NHK 국제뉴스를 보다, 중국에서 의료기기 스텐트 사업을 성공시킨 탁월한 젊은이가 있다는 보도를 보고 직접 연락을 취하였다. 결국 그 M1을 스카우트했고, 지주회사를 맡겨 중국 전체 지사 통괄직까지 맡기게 된다. 상해에 있는 지주회사의 동사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영어도 잘하였고 의료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중국에서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다만 난해한 의약품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의 뒤를 이은 또 다른 동사장인 M2는 북경 사람으로서 북경대 외과 의사 출신이다. 일본의 대학에 유학을 왔다가 본사 연구소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2000년대 초반 당시로서는 희귀한 중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그를 유용하게 쓰기 위해 오너가 발탁하여 중국실에 근무하게 하였다. P가 중국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오너에게 소개를 받았다. 그는 P의 어려움을 요모조모 살펴가면서 중국의 의사 인맥을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P를 도와 일을 하다가 나중에 오너가 그를 눈여겨보고 북경의 연구개발 전문회사를 만들어 주었다. 그 회사에 총경리 겸 동사장으로 취임하여 중국에서 연구개발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다. 회사를 크게 키웠고 현재는 중국 지주회사 동사장으로 활약하는 사람으로 만주족이다.


   P가 발족시킨 치료약 전문 회사의 총경리를 겸하고 있는 D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회사의 문제점을 정리한 해결사였다. M1이 소개하여 사업부에 발을 들이고, 중국 의약품 회사 지사장까지 되었다. 상당히 솔직하고 문제점을 해결해 내는 능력과 통솔력을 갖고 있어서, 복잡하고 어려운 중국 지사의 가시덩굴을 쳐내고 말끔한 의약품 회사로 정립시킨 인물이었다. 그가 처음 회사를 맡았을 때 의약품의 매출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회사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합리적이고 의료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으며 리더십도 강했다. 또 한국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했고 H를 만나러 M1과 함께 서울에 와서 교류회를 가지거나 생신을 축하하러 방문하였다. H가 은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자리를 만들면서 H를 섬겼던 의리 있는 사람이다.


   M1은 퇴사하여 자기 사업체를 키워서 홍콩과 미국에서 상장시켰다.

   M2와 Z는 아직 현역이며 H의 서거에 조화를 보내주었다.


   중국인들 중에도 의리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P가 생각하건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가릴 거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의리 있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국가 간 교류에 많은 정성을 기울이며, 한 사람도 허투루 사람을 대하지 않는 무리들이다. P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다.


   P가 겪었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있는데 대다수는 지금 현업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씩 거명하여 언급을 하기는 어려우나, P와 희로애락을 같이 했던 후배들 F4가 있다. 그들은 P가 마지막까지 근무했던 회사에서 같이 일을 했으며, 영원히 우정을 나눌 존재들이다.


   P가 처음 입사하여 근무했던 시절부터 교류관계를 이어온 선후배들도 많지만, 비즈니스적으로나 또 다른 모임에서도 같은 라인에 서서 정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100명 정도이다.


   회사 생활에서 만난 중요한 사람들은 명함으로만 따지면 1000명은 족히 넘어 보인다. 중국 시절 받은 명함만 해도 오백 장을 훌쩍 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쓸모 있는 명함만 고르라고 한다면 친밀도 기준으로 백 명도 안 되고, 더 좁히면 수십 명 정도일 것이다.

   나라별로 따지면 많아야 한 나라당 10명 정도가 진정한 우정을 나눴다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에서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여러 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인적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P가 둥글둥글하게 살아온 인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36년 동안 직장 생활을 통하여 사귄 많은 사람들은 P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도 주었으며, P 또한 그들에게 많은 정을 베풀고 오랜 교류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다. 그것이 기업에서는 매출 실적과 성공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사람의 삶에 있어서는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고 윤택한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제 회사라는 울타리를 나와 밖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그래도 한 울타리에서 같은 솥의 밥을 먹었다는 정(情)만큼은 영원히 잊지 않고 간직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P가 회사에서 동고동락했던 F4나 영업부 선후배들은 죽마고우 같은 친구들이다.


   P는 유감스럽게도 같이 연수에 갔다가 똑같이 마케팅을 시작했던 동기 둘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다. 다들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동기간에도 경쟁의식이 과열되어 만남이 어색해져 버렸다.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영업마케팅 동료들과는 지금도 꾸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15명의 모임이 있다. 이 OB 모임은 무려 20년 이상 이어졌는데 형제 같은 돈독한 친목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만나 당구도 치고 막걸리도 한 잔 하면서 지나간 일을 회고하기도 한다. 또 현재 하고 있는 일의 근황을 이야기하면서 앞날을 어떻게 개척해 나갈지 같이 고민하기도 한다. 동시대에 익어가는 중년의 허전함을 서로 격려하며 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이다.


   그들과는 일본인 상사들을 만나러 4월에 도쿄로 여행을 다녀왔다. 초창기에 한국에서 고생해 준 상사들도 70세를 넘었기에 그들을 잊지 못하고 만나러 기획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진한 우정과도 같은 관계가 길게 이어지고 있고, 또 P를 매개체로 일본 상사들과의 교류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속설을 깨부순 새로운 전형이기 때문에, P로서는 소중하게 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서 비즈니스는 만들어지는 것이고, 거기에 물건이 개입될 뿐이다.

   물건을 놓칠 수는 있지만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


   P는 사람을 놓치면 어떤 일이든 성공할 수 없다는 어르신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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