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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Mar 17. 2024

강남역 미아 5장 2화

오너와 CEO_오너_2

   오너 A에 대한 존경과 추앙심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P 개인의 입장만 놓고 보면 사뭇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P가 중국에서 귀국한 후 그 많은 과업을 주도한 A를 자주 마주쳤다. 하지만 A는 본인이 기대한 만큼 P가 중국 비즈니스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이유로 아는 체를 하지도 않았으며 완전히 P를 무시하였다.


   한 번은 단 둘이 화장실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A가 앞과 옆을 보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일부러 P를 외면하였다. P는 인사하기 어색하여 입구에서 기다릴까 망설이다 그냥 뒤돌아섰다.


   또 한 번은 A가 미술관 건물에서 일행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는데, 방문 직원들을 관내에 풀어놓은 P 혼자서 동승을 하게 되었다. A를 수행하던 임원들이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하였지만, A는 간단한 눈인사조차도 건네지 않았다. 마치 유령을 대하듯 하였다.


   A 앞에서 P는 투명인간이었고 지독하고 철저한 증오인지 미움인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런 취급을 받고 사는 것에 마음이 불편했던 P는, 가끔 H나 A의 비서실장에게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며 무거운 심경을 토로했지만 그들은 단지 참고 견뎌내라는 위로의 말만 건넬 뿐이었다.


   회고해 보면 몇 가지 해프닝을 통해서 여러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A는 P가 중국에 재임하던 시절, 아시아 사업부장과 중국실 실장 사이에 갈등이 심했을 때, 두 사람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서를 부탁했다. 당시 P는 사람들에 대한 동태를 살피고 보고서를 보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보고 H와도 상의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H 또한 선뜻 파단을 유보하였다. 물론 A는 경영을 하기 위해 많은 정보가 필요했겠지만 P는 정보원 역할을 하는 것이 성격에도 맞지 않았을뿐더러 결국 H도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조언하여 한 번도 보고서를 쓴 적이 없었다. 이것에 대해서 A가 P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귀국 후, 중국 해남도에서 아시아 전체 책임자 회의가 있었다. 둘째 날 만찬 자리에서 아시아사업부 음료 책임자인 M이 다가와서 P에게 음료 분야의 업무로 보직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왔다. 의약품 담당자가 음료 파트로 옮기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음료 쪽에 문외한이었던 P가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이때도 P는 H에게 상담했고 H는 A의 의중을 잘 아는 S에게 이것이 최상층부의 의견인지 확인해 보라고 조언하였다. P가 S에게 조용히 묻자 S는 도리어 그 제안을 했던 M에게 진의 파악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M은 자기가 그런 제안을 한 적이 없노라며 잡아뗐다. 다음날 회의 중간 커피 브레이크 타임 때 M과 마주쳤는데, 느닷없이 P에게 버럭 화를 내며, 자기가 언제 너에게 음료파트로 와서 일하라고 했느냐며 호통을 치더니 큰 눈을 위아래로 데룩데룩 굴리며 노려봤다. 결론적으로 P는 윗사람들에게 휘둘리는 꼴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H에게 상의해서 취한 결정이 P의 직장 인생에 그다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회고한다.


   P가 근무했던 그룹사에도 여느 조직처럼 암투와 술수가 난무했다. 특히나 P가 몸담았던 오너 중심의 One Man Company에서는 황제의 마음을 사기 위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움직임이 늘 꿈틀댔다. 기업은 살아있는 생명체였고 조직원들은 줄을 대거나 잡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P는 이러한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댔다. 피곤한 나날이었다.


   P는 어느 날 그 해에 입사한 직원들을 데리고 일본에 단기연수를 갔었다.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이었다. 일본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에어컨 온도를 26~28도에 맞춰놓아 오사카의 해외본부 사무실에는 부채를 부치는 직원들이 많았다. 마침 그날 저녁 식사는 납량회(納凉會)가 열리는 날이어서 다들 시원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자리를 빛내주러 나온 A에게 한국에서 데려간 직원들을 인사시키자, "P는 일본어만 잘하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하였다.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는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듬해였기에 아직 앙금이 남아있었는지 A가 P를 대하는 태도는 냉정하게 변해 있었고, 이후 P는 A와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제형을 변경한 신제품의 개발 프로젝트를 맡기려고 사업부장 S가 A에게 최종승인을 받으러 갔다가, "왜 P 같은 인간에게 일을 맡기느냐"는 훈계를 듣고 접은 일이 있을 정도였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에서 근무하다 새로 부임한 사업부장 T는 P의 능력을 알아보았다. iPad를 활용하여 마케팅에 접목시킨 신규 학술프로젝트를 맡기고 전체 회의에서 기습적으로 발표를 시켰다. 어젠다와 프로그램에 들어있지도 않은 전격적인 깜짝 발표였기에 회의장은 술렁거렸다. P는 사전에 통보를 받고 준비한 슬라이드 10장을 10분 동안 스마트하게 발표하였고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나중에 T는 A에게 혼쭐이 났다고 한다. 결국 T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며 회사를 떠나고야 말았다. 외부에서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영입되어도 A의 의중을 빨리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였고 기존 임직원들과 잘 융화되어야 했는데, 이 특별난 조직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직장에서는 반드시 재능이 있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질시를 받기도 해서 낙마하기도 한다. 꼭 윗사람을, 아니 줄을 잘 잡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P는 그저 H만을 믿었고, 그것이 고래심줄인 줄 알고 믿고 따랐지만, 알고 보니 썩은 동아줄이었을지도 몰랐다. H 역시 성골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룹사에서 아무리 해외 인재를 영입하고 수많은 지사를 만들었어도 성골은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P가 느끼기에 처음부터 본사에서 근무한 일본의 인재들이 성골, 외부에서 영입된 일본인 인재들이 진골이었으면, H와 같은 해외 출신 고위직은 육두품이었다. P는 오두품 쯤이었을까?


   동경대 출신은 매우 드물었고, 있어도 버텨내지를 못하거나 출세하지도 못하였다.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나 보다.


   A와 얽힌 또 다른 추억도 많다.


   중국 칭다오에서 거행된 행사 다음날, P를 포함해 여럿이 A를 중심으로 산행을 하게 되었다. 성큼성큼 앞서나가던 P에게 A가 갑자기 몇 살이냐고 묻더니,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P는 A의 아들뻘이었으니 귀엽게 보였을 것이고, 당시 A는  60대 중반이었으니 P를 보면서 젊음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A의 눈이 가늘어지고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P는 30살이 되기 전에 A 앞에서 처음으로 발표를 하였다. 벌벌 떨 법도 하였지만 시골 아저씨같이 생긴 A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눈을 마주쳐가며 차트를 넘기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매출 목표를 내세우자, A는 그 자리에서 일본인 지사장을 꾸짖었다. 잘못 가르쳤다는 서릿발 같은 지적이었다. 지사장은 쩔쩔매며 새로운 시장조사 방법을 도입하겠노라고 사과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A는 줄곧 문명과 문화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삶에 공헌해야 할 의료의 위상과 가치를 설명하였는데, 독특한 그만의 철학이 있었다. A는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질문도 하고 과제를 내주기도 하며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P에게 추천해 준 책은 데미안, 싯다르타, 전략적 마케팅, 3권이었다. 먼저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서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라, 내공을 쌓아라, 모든 것을 감(感)으로 하지 말고 전략적으로 판단하라, 적시의 타이밍에 과감히 승부수를 던져라, 등등의 가르침을 간접경험하도록 권유했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회사를 만들자, 우리는 빅 벤처(Big Venture)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돈과 인재가 몰리는 회사를 만들자, 등등 끊임없이 화두를 던져가며 도전적인 모습과 창의적인 자세로 그룹을 주도하며 액셀을 밟아댔다.


   A는 여러 대규모 글로벌 회의를 주관했다. 전 세계 경영자회의, 아시아 책임자회의 같은 경영미팅이 주류였다. 이와 더불어, 해마다 4월 하순이면 연구소가 있는 발상지의 지명을 붙인 R&D 콘퍼런스도 주관하여 연구개발사업을 독려하였다. 여기에는 P가 다녔던 회사의 임직원들도 참가하여 본사의 연구방향을 읽어가면서 앞날을 가늠하곤 하였다.


   이 행사는 전 세계에 있는 수십 개 연구소에서 신규 연구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공로자를 표창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운집한 관계자들이 콘퍼런스장에서 대규모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면서 인맥도 쌓는 교류의 기회가 주어지는 잔치마당이었다.


   저녁 만찬은 콘퍼런스 회의장 주변의 홀에서 수백 명이 모여 입식뷔페로 먹었다. 온갖 진수성찬에 고급 와인을 음미하면서 평소 만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새로 소개받은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느라 시끌벅적한 행사였다. 만찬장의 한가운데에 황제 A가 자리 잡고 있으면 직원들이 줄을 서서 순서대로 인사말을 나누고 현안을 화두로 내세우며 A의 한 말씀을 듣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H는 P를 앞세워 임직원을 모이게 하고, 무리를 지어 A에게 인사를 하며 눈도장도 찍으면서 덕담을 나누게 하였다. A비서를 시켜 사람을 불러 소개를 시켜주거나, 연구 방향에 맞춘 아시아 비즈니스의 좌표를 설정해 주기도 하였다.


   A는 줄곧 한국사람들이 우수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인재들이 정서적으로 융합하기 어려운 일본 회사에 들어와서 제품에 믿음을 갖고 글로벌 마케팅을 해주며 인허가 문제까지 해결해 주고 있다면서 늘 고마움을 표시해 주었다.


   이 거대한 기업은 매출액의 15% 이상을 연구비로 쓸 정도로 신약개발에 열심이었으며 그것은 곧 회사를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반드시 미래의 먹거리를 찾아내야만 하는 힘든 분야가 제약사의 연구분야였다.


   A는 낮에는 일로 분주했지만 저녁에는 교류회를 좋아해서 여흥을 즐겼다. 일 잘하는 능력자에 술도 잘 마시고 노래도 잘하는 젊은 직원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중용되기도 하였다. 일단 A의 눈에 들기 위한 유니크함을 발판으로 백가쟁명의 기치를 내걸고 토론과 비판에 앞장서면 운 좋게 발탁되기도 하였다.


   그의 눈은 누구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섭고 매서운 눈이었다. 그 두터운 눈뚜껑 속에서 번뜩이는 눈초리를 보면 감히 거역할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예스맨 밖에 없어서 제대로 된 실상을 전달하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했다. 어쩌다 직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 다 이미 은퇴했거나 조직을 떠난 사람이었다.


   A는 종종 중요한 VIP들을 따로 초대해서 태평양 연안에 자신의 요트를 띄우고 20명 규모의 선상파티를 열어주었다. 배 안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마셔가며 환담을 나누었는데, 포도주 색깔만큼 진한 의제를 놓고 게스트나 혹은 임직원들과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하였다. 물론 A가 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대화 상대방은 바로 그 자리에서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인공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A만큼 학식과 지혜, 그리고 수많은 경험을 쌓은 카리스마의 전형도 드물어서, 연구개발 책임자들이 쩔쩔매는 상황을 수도 없이 목격하였다. 해박한 경영지식에 연구소, 공장, 마케팅, 영업, 심지어 신제품의 디자인까지 관심을 가졌고, 제품들은 그의 손과 머리를 거치면서 생명의 입김이 불어넣어 졌다. 가히 살아있는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받을만한 인물이었고, 탁월한 경영자였다.


   A는 황제였고 사장들은 작은 제국의 왕이었다. 애초부터 Emperor와 King은 신분이 다르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이런 인물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삼성그룹과 묘하게 닮은 구석도 있어서 P는 가끔 두 집단을 비교해보곤 했다. 2대 이건희 회장과 3대 이재용 회장의 관계는, P가 다닌 그룹사의 3대째 오너 A와 4대째 오너의 모습과 뭔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었다.


   카리스마의 대척점에는 독재자의 이미지도 서려 있었는데, 5만 명에 육박하는 직원에 매출이 20조 원에 달하는 거대 공룡을 움직이려면 당연히 필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A는 젊을 때부터 너무 과도한 에너지를 쓴 나머지 70대 중반부터 병석에 눕기 시작하였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병문안을 오면 질투한다는 말도 들려서 10살이나 더 많았던 H는 선뜻 병원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의료 선진국 일본의 최첨단 테크놀로지도 A의 병세를 꺾지는 못했다. 병세가 완연해지자 면회도 사절되었다. 당시 전 세계 연구총괄 책임자였던 Y가 10년 동안 무시당하며 살아온 P를 안타깝게 여기고 비서실장을 움직여서 어렵게 P와 A의 단독 면담을 주선하였다. 하지만 면담 당일 아침에 갑작스러운 A의 병세악화로 약속은 취소되었고, P는 일정을 앞당겨 귀국해야만 했다. 운명의 여신은 끝내 마지막 상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에 만나지 못할 숙명이었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병세가 깊어가던 A는 어느 날 방문한 Y에게 P의 안부를 물으며, 요즘 뭐 하며 사느냐는 걱정을 했었다고 한다. 마지막이 가까워오자 그리운 사람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만약 입원 중이던 A를 P가 알현하고 서로 불편해진 사이를 해소하였더라면 P의 앞날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드러나지 않게 A는 P를 걱정했다고 하며, 늘 P가 뭐 하며 사는지 궁금해했다고 한다. 한 번은 더 기회를 주려고 했었다는 비서실장의 전언이었다.

  

   어느 해 갈수록 병세가 깊어진 A가 아시아 책임자 회의에 부축을 받고 나타났다. 그는 본인이 주최해 온 이런 큰 회의에서 다시 부하들을 만나서 사람들 앞에서 호령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전만큼 위대한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고 간신히 걷는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업부장 M이 P에게 얼른 곁에 가서 인사라도 하라고 종용하였다. P가 곁에 다가섰지만 A는 알아듣기 어려운 웅얼거림으로 예전의 측근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 직원은 연신 자기 귀를 쫑긋해 가며 말하고자 하는 키워드를 파악하려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P가 만나서 인사말을 건넬 상황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날이 실제로 본 마지막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뒤에서 얼마 못 살 거라며 수군거렸다.


   P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인터넷 망에 실린 A의 영정사진을 마주해야 했다. 황제 A는 창업 100주년을 7년 앞두고 지주회사 상장만 시켜놓은 채, 7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P에게는 20대 후반부터 25년간 가르침을 주었고, 직장인으로서 살아갈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으며,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DNA를 전파해 주었던 A였다. 그는 유니크한 성격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심했던 인물이었다.


   P의 경우 중국에서의 고된 생활까지가 밀월관계였다면, 귀국 후부터는 불호(不好)의 관계로 접어들었고, 끝내 마지막 얼굴을 알현하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A는 200개가 넘는 계열사와 공장과 연구소 움직임까지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다. 최소 1000명의 인재 풀을 기억해 내며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용병술의 귀재였다.


   황제 오너 A 덕분에 젊은 나이부터 왕이 된 능력 있는 사람들은 마음껏 기회를 누리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남몰래 눈물짓는 임원들도 많았다. 과장급을 사장직으로 올리는 파격적인 인사를 즐겨했으니, 멀쩡한 부장이나 임원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10초 인사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어떤 보직에 누가 적임자냐고 물어오면 10초 안에 이름을 대었기에 생긴 말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인사 책임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제시하며 "이 친구는 어떨까요?"라고 물어오면, 고개를 끄덕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또는 손가락으로 이름을 가리키면 즉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인재풀을 꿰고 있었고 판단력이 빨랐던 모양이다.


   그렇게 본인이 낙점한 사람이 승승장구하면 "거봐라, 내 눈이 얼마나 정확한가!" 하면서 흡족해했고, P처럼 기대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면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고 한다. 자신의 결정을 과신하였다가 실망하면 더욱 화가 나는 법이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고도의 계산법에 따른 것으로, 뜻밖의 인사이동을 통해 메기 한 마리를 연못에 집어넣어 휘저어대면 자연도태가 생기고 승자의 법칙에 의해 혼돈의 연못이 정화되어 갔던 것이다. 일부러 카오스를 만들어 흔들어대기도 했다.


   A는 코스모스보다 카오스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창의적인 발상이 생긴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P의 뇌피셜에 근거한 추측이다.)


   하지만 A를 수십 년이나 보필했던 충실하고 명석한 비서들은 임원으로 올려주지 않았을 만큼, 오히려 측근들에게는 더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A는 국적을 불문하고 인재라고 생각되면 적극 기용했다. 그에게 있어 피부색, 종교, 국적, 성별,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30대의 젊은 여사장도 있었고, H 같은 80대 회장도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A는 한국노래도 좋아했으며, P는 A의 요청으로 반주도 없이 숟가락 마이크를 잡고 그가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즉석에서 불러주곤 했다.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가 그의 18번이었다. 어느 날 오사카의 다다미 방에 가라오케 시설을 갖춘 요리 집에서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사실 P는 이 곡을 잘 몰랐다. 일단 마이크를 잡고 반주에 맞춰서 흥얼거리기 시작했는데, P가 노래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자 A가 얼른 옆에 다가가서 지원사격을 해주며 미안해했다. 인간적이고 수줍은 면도 있던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진격하여 거대기업을 키운 A는 도련님들이 모인 얄상한 도쿄를 싫어해서 상업의 도시인 오사카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가 도쿄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어쩌다 행차를 하면 CEO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쿄 본사의 회장실은 늘 비어있었고 중역들은 결재를 받으러 오사카나 발상지로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했다.


   A는 오사카 중심부의 단골 카운터 초밥집, 가라오케, 고급 클럽을 다녔지만, 1차는 반드시 회사 건물 내에 있는 직원 전용의 복리후생 바에서 시작하였다. 거기서 한잔 하며 담소를 즐기다 저녁을 시작하러 나가는 소탈한 성품이었다.


   A는 서울에 오면 갈비를 먹고 진로소주를 마셨는데 젊은 직원들과 허물없이 어울렸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직원들에게,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니 곧 결혼하겠구먼!" 이런 농담을 쉽게 하며 껄껄 웃었다.


   한국의 합작 파트너사 사업주들은 A의 비위를 맞추러 고급 레스토랑을 소개하곤 했지만, 의외로 서민적이고 조용한 곳을 선호해서 장소 선정에 애를 먹기도 하였다. 한국 측 사장은 귀한 신약이나 잘 나가는 제품 하나라도 도입하려면 융숭한 대접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수십 가지 반찬이 나오는 한정식 궁중요릿집에서는 갈빗집과 비교하며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기도 했다. 요는 아무리 많은 반찬이 나와도 젓가락이 가는 것은 몇 안된다며, 우리 기업은 다품종 전략이 아니라 소수정예전략이라는 즉석 경영화두를 끄집어내고 강의를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A는 유명한 한정식집보다 단순한 갈빗집과 냉면을 좋아했다.


   야망이 컸던 A는 본인이 설계한 거대한 구상을 실현시키려 애썼지만 자기 뜻을 이해하고 따라줄 만한 브레인들이 부족해서 늘 사람에 배고파했다. 전 세계의 인재를 찾아내느라 온갖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가끔 P는 일본의 관료 출신이나 재벌 출신, 혹은 학계나 경쟁사 출신으로 중도채용된 사람들을 소개받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진골은 성골을 넘어설 수 없었나 보다.


   자그마한 시골 어촌에서 출발하여 자기 대에 이르러 굴지의 글로벌 그룹사로 키워냈으니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한국을 좋아해서 자회사를 5개나 만들어주고, 고용을 창출하였으며, 세계 수준의 공장도 지어주었다. 인재를 발굴하여 글로벌 무대에 적극적으로 등용해 줬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도 인간이었고 질병과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글로벌제약 그룹사의 총수도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A의 서거 후에 P는 H와 비서실장을 따라 묘소에 참배하러 갔는데, A가 생전에 좋아했던 빨간 뚜껑 진로소주를 가져가서 묘비에 부어주었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황제 A는 창업가의 생가 근처인 기업의 발상지에 그의 육신을 묻었다. 가끔 그의 영혼이 추종자들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특유의 DNA가 발동하여 누군가를 통해 되살아나곤 하지만, 이제 서거 10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히고 있다.


   A의 아들은 창업 4대인데, 모친을 닮았는지 수줍어하고 얌전하며 내성적인 성품이다. 아버지의 유전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강했던 아버지의 기(氣)에 눌렸나 보다.


   이제 이 거대 바이오의약그룹은 토털 헬스케어를 지향하는 CEO 그룹이 이끌어가면서, 과거의 카리스마 강한 오너 중심의 회사에서 관료조직으로 변모하고 있다. 수비에 주안점을 둔 회사가 되어가고 있는 듯 보여서 한편으론 슬프기만 하다.


   많은 직원들은 4대째 오너가 발언권을 더 강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너는 오너이기 때문이다.


   P는 최근에도 A를 꿈에서 만났다. 10년간 못 나눈 이야기들,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아직도 할 말이 많으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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