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2-6

by 세타필

그 자리에는 나와 나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색했다. 아침의 그 사건을 겪고 나니 더더욱. 나는 이리저리 가게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며, 메뉴며…. 어릴 때 자주 가던 분식집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리와 함께 분식을 먹었던 것이 기억났다. 나리를 쳐다보니, 그녀도 가게를 여기저기 훑어 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리는 이내 눈길을 거두어 나를 바라보았다.


왜? 너무 빤히 바라보았는지 나리가 말했다.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냥…. 어릴 때 생각이 나서. 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금세 볼이 빨개졌다. 나도 볼이 잘 빨개지는 편인데 마찬가지네.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어릴 때 이런 분식집에서 군것질했었잖아. 맞아 그랬어. 나리가 빨개진 얼굴을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때 그 집이 참 맛있었는데. 맞아. 내가 나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물 떡이 진짜 맛있었는데. 나는 물 떡을 별로 안 좋아했어. 맞아, 어릴 때 난 그게 진짜 이해가 안 됐어. 이렇게 맛있는 걸 싫어한다는 게 말이 돼? 별로 맛없었는데? 그냥 물에 빠진 가래떡 맛이야. 아니거든.


우리가 투닥거리는 사이 호열이가 주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유리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양자 토론이 100분 토론이 되었다. 물 떡 고유의 맛에 대한 토론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서야 잦아들었다. 떡볶이와 어묵이 한 상 가득 담겨 나왔다. 나리가 양을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배만 조금 채우기로 했잖아. 맞는데 내가 배가 너무 고파서. 호열이가 나리의 질문에 대답하며 어묵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나리는 무언가 매우 실망한 눈치였다. 분식을 좋아했던 걸로 아는데, 그새 입맛이 바뀐 건가?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리를 보며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물론 이 생각은 내 머릿속에 오래 담겨있지는 못했다. 나도 이호열처럼 분식을 허겁지겁 먹는 데 집중했으니까. 배가 매우 고팠다. 우리는 허겁지겁 분식을 해치웠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아니고 나와 내 친구만 그랬다. 나리와 유리는 어묵 한 점과 떡볶이 조금을 먹기만 했다. 대부분의 음식은 남자 두 명의 배로 들어갔다.


분식을 먹고 배가 찬 나와 이호열은 기분 좋게 어린이 대공원을 향한 남은 여정에 오를 수 있었다. 유리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때보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리는 왠지 모르게 걱정에 찬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힘이 솟아올라서 그런지 어린이 대공원 입구에 우리는 금세 도착했다. 분식집 이후로 넷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게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가니까. 분식집에서 나와 나리가 물 떡을 가지고 투닥거린 후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편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길을 걸을 때야 남자 둘 여자 둘로 나뉘어져 걷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이야기를 걸 수 있다는 점은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들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학원에서 하는 선생학습에 대해, 학원 선생님들에 대해, 앞으로 펼쳐질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학원에서 무섭기로 유명한 선생님에 대해서 같이 뒷담화를 하고, 앞으로 겪어야 할 야자라는 것의 무서움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나는 기분이 매우 편안해졌다. 어떤 생각까지 들었냐면, 나는 그들이 나와 크게 다른 동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린이 대공원.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의 손을 잡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이라 기억이 흐릿하긴 했지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억을 끄집어내 보자면, 입구에 온갖 동물들과 함께 커다란 글씨로 적혀있는 어린이 대공원 아치형 간판과 그것보다 더욱 커다랬던 호수, 그리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흔들다리가 생각이 났다. 그런 경험이 있는가?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기억 속 장소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때 그 장소의 모습이 내 기억 속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이유 모를 기쁨. 그것을 그날 느낄 수 있었다.


입구에서 표를 구매하고 정문을 통과했다. 길은 야간 오르막이었지만 그렇게 걷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초읍 어린이 대공원은 성지곡 수원지라고도 불렸는데, 왜 그렇게 불렸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호수였다. 우리는 호수의 주변을 돌면서 산책했다. 별다른 걸 하지는 않았음에도 기분이 꽤 좋았다. 평소 호열이와 걸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난 그 점이 참으로 신기했다. 왜냐하면 나와 호열이는 매일 학원이 끝나면 같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집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하는지 또한 참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에 도착했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넜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다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걸어 온 것처럼 두 명씩 짝지어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다. 1열로 줄을 서서 다리의 오른편에 붙어서 길을 건넜다. 호열이, 유리, 나리, 그리고 나 순으로 우리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중간쯤에는 크게 원형으로 생긴 휴식처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다 가기로 했다. 여자애들은 사진을 찍을 거라고 말했고, 나와 호열이는 그냥 팔을 난간에 걸친 채 휴식을 취했다.


쟤들은 왜 저렇게 사진 찍는 걸 좋아할까? 나도 몰라. 우리 남자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원형 휴식처의 반대편에서는 나리와 유리가 일일 모델과 사진사가 되어 있었다. 지나다니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히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참 대단하다 감탄했다.


사진과는 별개로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는 했다. 겨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주변의 호수는 햇빛을 반사하여 푸른 빛을 내뿜었다. 키가 큰 나무들이 호수를 수호하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사람들은 태운 롤러코스터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 순간, 어떤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끔뻑끔뻑하니, 나리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터벅터벅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응, 왜? 짐짓 쿨해 보이고자 노력한 톤으로 나는 질문했다. 나리가 말했다. 사진 같이 찍자.


애석하게도 나는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운동회 날이라든가, 소풍을 갔을 때라든가 할 때 항상 학교에서는 단체 사진을 찍곤 했다. 나는 그게 참 싫었다. 그냥 모두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개념 자체가 싫었다. 왜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그게 싫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순순히 그녀의 제안에 따라 사진을 찍었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브이를 그리며 나는 나머지 셋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바람은 여전히 많이 불었다. 내 반곱슬머리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리와 유리는 몇 번 본인의 머리카락에 뺨을 맞더니 그들은 묶어두기로 했다. 호수 중앙을 가로지른 후, 우리는 다른 산책로로 향했다. 여기에 흔들다리가 있어. 나리가 수줍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나는 기계처럼 대답했다. 아, 조금 더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어야지.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나를 호되게 질책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되는걸. 나는 속으로 변명을 되뇌며 세 명을 따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흔들다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로 가면 돼. 나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둘둘 나뉘어 걷고 있었다. 나와 나리, 호열이와 유리. 음, 뭔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곁눈질로 호열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열심히 말을 하고 있었다. 유리는 열심히 말을 듣고 있었다. 호열이의 눈은 유리를 향해 있었고, 유리의 눈은…. 길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에이, 몰라. 이건 녀석의 사업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에게 다른 사람의 연애 사업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나도 힘들다고.


잠깐의 외도 후, 나의 머릿속은 나리와 대화 주제를 찾는 데 열중했다. 음, 날씨 이야기는 이미 몇 번을 했고, 고등학교 이야기는 저번에 너무 많이 했지.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취미? 축구? 박지성의 부상 복귀에 대해 물어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드록바? 혹시나 나리가 해외 축구를 좋아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 이야기가 아주 쉽게 풀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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