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휘발되고, 상처는 희석된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by 봄플

기억은 휘발되고, 상처는 희석된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향수처럼 공기 속에 잠시 머물다, 어느새 사라진다. 기억은 빠르게 증발하지만, 어떤 감정이나 경험은 향처럼 은은하게 남아 마음에 스며든다.

처음엔 혼돈의 톱노트로 자리하지만, 언젠가 환희의 베이스 노트로 남는다.


한때 나는 취미조차 없었다.

읽는 것은 고통스러웠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저 회사 일에 매여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희망이 욕망이 되고, 욕망이 열정이 되어, 결국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열정이 가치 없다는 사회의 통보가 내려왔을 때,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희망은 사라졌고, 움직일 힘조차 남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시는 같은 상처를 겪고 싶지 않아, 마음에 드는 일이 생겨도 한 발짝 물러섰다.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현실에서도 곧 내던져질 날이 오고 있음을. 회사는 우리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한두 명이 아닌 다수가 내보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닐 수 있을 만큼만 다니자.' 그것이 첫 번째 생각이었다. '다시 취미를 찾고, 어떤 것이든 모든 걸 걸어보자.' 그것이 두 번째 생각이었다.

조금씩 사회에서 벗어나 '나'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행복했다.


아니면, 이런 시간도 필요했나 보다.

그동안 다른 이의 수많은 죽음에 대해 기도하기 바빴지, 나와 그들을 애도하는 시간은 없었다. 사회에서는 상처받기 바빴고, 치유하고 재활하며 걷어내는 작업은 못 했다. 피봇을 계획했으나 시뮬레이션하고 실현시키는 시도 또한 부재했다.

그런데, 단지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점차 시력도, 머릿결도, 치아도, 건강도 회복되는 듯했다. 고통 속에서도 책상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확신이 섰다.

이거다.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다.

역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병세 속에서도 나는 일어나 앉아 무언가를 끄적인다. 예전 같으면 누워서 넷플릭스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손만 움직일 수 있다면, '기회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파야 집에 있을 수 있고, 건강하다면 이 좋은 날씨에 밖에 나가 사색을 즐겼을 테니 — 고통은 어쩌면 좋은 기회다.

현실의 욕망을 채우기엔 나는 지나치게 성직자 같다. 정신적인 욕망만을 좇다 보니, 오히려 퇴폐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나의 욕구를 넘어,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 또한 사회에 직접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요즘 나는 하나의 명제에 점점 더 확신을 갖는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

경력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고, 직업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물론 지금의 기술은 아직 서툴다. 마치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불필요하게 시계열 분석까지 해버리는 신입 직원처럼 손이 많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분명 의미가 있다.

회사는 여전히 기술을 핑계 삼아 직원을 탓하고, 조직을 축소하고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핑계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이미 "한 회사에 오래 다니는 것만큼 사기 치는 일도 없다"는 말이 들릴 정도다.

결국 사회는 기초수급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될 변화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음을.

이미 시장의 조직은 실패했다.

더 이상 사기업, 특히 정부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일은 드물다. 조직은 사라지고, 경력은 휘발된다. 알코올처럼 빠르게 증발해 버린다.


그러나 남는 것이 있다.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이 가진 재능은 향처럼 남는다. 시간이 지나도 공기 중에 은은히 퍼지는 베이스 노트처럼.

이제 조향은 조직이 대신할 수 없다.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 조향 도구를 고르고, 시향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어떤 향료를 섞을지, 어떤 비율로 조합할지 —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부모에게, 자녀에게, 친척에게 기대어서는 안 된다. 이건 우리의 숙제다. 우리는 각자의 향을 만들어낼 조향사가 되어야 한다.


기억은 휘발되고, 향은 남는다.


2025.10.2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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