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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벤에셀 Apr 01. 2021

꼬마 레이디 버드

안녕, 내 이름은 이제부터 알았지야. 앞으로 나를 알았지라고 불러줘

며칠 전에 시얼샤 로넌이 나오는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았다. 영화 속에서 시얼샤 로넌이 맡은 크리스틴이라는 소녀는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는 모두에게 자신을 크리스틴이 아닌 레이디 버드로 불러달라고 한다.


이 영화는 자신에게 스스로 이름을 붙여주고는 그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소녀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로 크리스틴이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앞으로 그 이름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크리스틴의 성장 서사에 집중하며 크리스틴의 입장에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녀에게 주어진 상황을 바라보고 이해해나갔다.


그런데 오늘 삐또삐에게 어떤 문자 한 통을 받은 후, 영화에 나왔던 다른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삐또삐는 문자로 갑자기 자기를 이제부터 ‘알았지’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늘 나에게 주식이, 식주, 에이미, 엘리스 같은 여러 별명을 붙여주기만 했지 스스로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여준 적이 없었던 삐또삐가 갑자기 이제부터 자기를 ‘알았지’라고 불러달라고 한 것이었다.


9살 삐또삐가 갑자기 자기를 ‘알았지’라고 불러달라고 한 데 그렇게 큰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자신을 자기의 이름이 아닌 그 무엇으로 불러달라고 한 삐또삐를 보고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이 생각났다. 그리고 며칠 전 그 영화를 봤을 때는 크게 시선이 가지 않았던 한 인물이 더 떠올랐다.


바로 크리스틴의 엄마 매리언이다.


매리언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딸 크리스틴과 여러 번 다투기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달라는 딸을 ‘레이디 버드’로 불러주며 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으로 나아가고 있는 딸을 걱정어린 마음으로 그저 지켜보면서 언제나 딸의 뒤를 애정으로 받쳐주던 매리언이었다.


레이디 버드로 살아가고자 하는 크리스틴과 여전히 크리스틴이라는 딸을 키우고 있는 중인 엄마 매리언


매리언은 자기도 예전에 경험해보았을 성장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딸을 묵묵히 바라봐준다. 그런 매리언이 있었기에 크리스틴은 영화 말미에 이르러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크리스틴’이라는 이름까지 다시 받아들이게 되는 성숙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아직 초등학생인 알았지에게도 크리스틴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그 어느 날 어쩌면 알았지는 다시 한 번 자기를 또 다른 그 무엇으로 불러 달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이 알았지에게 찾아왔을 때, 나는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지금의 나처럼 모든 게 서툴 언젠가의 알았지의 곁에서 매리언 같은 좋은 어른의 모습으로 있어주고 싶다.


그리고 그때의 알았지가 불러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그 아이를 불러주고 싶다.


크리스틴에게 ‘레이디 버드’는 자기표현의 이름이었지만 크리스틴을 ‘레이디 버드’로 불러주었던 엄마 매리언에게 ‘레이디버드’는 딸의 지금 모습을 인정해주며 사랑해주는 딸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담긴 이름이었다.

크리스틴은 엄마 매리언에게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나도 알아. 근데 엄마는 날 좋아하냐고”, “난 그냥 엄마가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아마 계속해서 알았지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모습으로 변해갈 알았지의 다양한 모습들 역시 좋아해주려 한다.

딸의 지금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호명해주었던 매리언처럼 나도 내 사랑스러운 꼬마 친구를 지금은 알았지로, 그 언젠가는 또 다른 무엇으로 불러주려고 한다.


알았지가 자라면서 자신에게 새롭게 붙여줄 또 다른 이름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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