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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벤에셀 Apr 01. 2021

재미있는 날

자기가 아는 가장 좋은 말로 나를 맞아준 삐또삐

기분의 좋고 나쁨은 결국 관성이다. 기분을 좋게 만드는 아주 사소한 일들이 조금씩 모이면 그 좋은 기분은 관성의 힘에 따라 더욱 증폭된다.

 

내가 관성적으로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 좋은 기분이 더욱 증폭되는 곳이 내게는 찬이와 욱이의 집이었다.

 

두 번째로 찬이와 욱이네 집에 갔던 날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만큼은 주연이가 아닌 주식이로 불리듯 욱이는 집에서 삐또삐로 불린다. 내가 주식이가 된 데 특별한 이유가 없었듯, 욱이가 삐또삐가 된 데도 별 이유가 없었다. ‘삐또삐’는 그저 욱이가 자주 하던 말 중에 하나였다.

 

욱이, 아니 삐또삐는 그날 내가 온다니까 자기 방 문 앞에 A4용지 하나를 붙여 놓았다. 그 종이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무언가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재미있는 날’이라는 말이 써 있었다.

 

삐또삐는 내게 이 방에서는 ‘재미있는 날’을 보내는 게 규칙이라고 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종종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데 재미를 느끼곤 한다.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나도 어렸을 때 나만의 규칙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내가 만든 규칙을 재밌게 잘 따라주는 어른들을 좋아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시간이 많이 흐른 언젠가 나도 삐또삐에게 그런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삐또삐가 새로 만든 규칙에 한껏 기대감과 흥미를 드러내며 삐또삐의 기분에 내 기분을 맞췄주었다.

 

‘재미있는 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인 것 같다. 9살 삐또삐가 아는 말 중 가장 좋은 말이 ‘재미있는’ 이라는 말이었을 텐데,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말로 나를 맞아준 삐또삐의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나에게 관성적으로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던 삐또삐만의 수많은 규칙들이 고마웠다. 그 아이와 함께 보낸 모든 날들이 참 재미있는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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