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B>에서 만난 문장
2년 전 데이브는 <기브 앤 테이크 Give and Take>를 읽고 저자인 애덤에게 연락해 자신이 CEO로 근무하는 서베이몽키 SurveyMonkey 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초청했다. 그날 애덤은 우리 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셰릴 샌드버그, 애덤 그랜트 <옵션 B> 17쪽
〈옵션 B〉를 읽고 있다. 이 책은 페이스북 COO 셰릴 샌드버그가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하며, 사랑하는 이를 잃는 예기치 못한 상실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회복탄력성에 관한 기록이다. 서문에는 그녀의 남편 데이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와 어떻게 다시 연결되어 두 사람이 어떤 통찰을 바탕으로 함께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책을 읽다 문득 멈칫하게 된 지점이 있었다. 상실의 대상으로 이야기되는 셰릴 샌드버그의 남편, 데이비드 브루스 골드버그가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서베이몽키(SurveyMonkey)의 CEO로 재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2015년 5월, 멕시코 휴가 중 심장 부정맥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할 때까지 그는 현직에서 회사를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개인용 설문 도구로 익숙한 구글폼보다 더 복잡한 고급 분석과 로직을 제공하는 서베이몽키는 리서치와 연구 현장에서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웹서비스다. 그가 몸담았던 일, 조직, 그리고 그를 통해 작동하던 세계들까지 생각이 확장되다가, 그 누구보다도 내가 그 세계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2년에 세상에 나왔던 나의 첫 번째 논문은 약 700여 명의 참가자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을 서베이몽키를 통해 모집해 완성한 연구였다. 심리·행동 측정 질문지를 표준화하는 작업이었기에 척도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확보하려면 무엇보다 많은 참가자가 필요했다. 2009년, 교환학생을 마치고 막 미국에서 귀국했던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서베이몽키라는 비교적 새로운 도구를 알게 되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학부생이었던 나는 용감하게도 교수님께 이 서비스를 학과 연구비로 구입해 달라고 건의했다. 나는 학부생의 신분이었지만 대학원생들과 교수님들이 모두 모여 있는 학과 전체 랩미팅 자리에서 서베이몽키가 어떤 서비스인지, 어떤 장점이 있는지, 그리고 심리학 연구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직접 프레젠테이션 했다. 그날의 벌렁거리던 가슴은 아직까지도 꽤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결과 심리학과에서 공동으로 사용할 유료 계정을 구입하게 되었고, 이후 몇 년 동안 우리 대학교에서 진행된 설문 기반의 심리학 연구들 대부분은 이 도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내가 이 서비스를 처음 알게 되었던 2009년은 데이비드 골드버그가 서베이몽키의 CEO로서 서비스의 방향과 안정성을 만들어가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이후 나는 유료 회원으로 이 플랫폼을 사용하며 세 편의 학술 논문을 썼다. 그것은 곧 그가 설계한 시스템 위에서 사고하고 질문을 만들며 응답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학문적 성장을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어떤 깨달음이 왔다. 연구자의 이름은 논문에 남지만, 그 연구를 가능하게 한 토대는 좀처럼 기록되지 않는다.
나의 연구와 학문적 성장에는 이 사람의 몫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의 결과물 뒤편에는 이름 없는 기여자들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논문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지만, 분명히 거기에 함께 있었다. 어찌보면 나의 학위 논문은 일정 부분 이 사람에게 빚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보통 지도교수와 참고문헌, 이론가의 이름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의 성취는 사실 이런 보이지 않는 인프라를 만든 사람들의 손길에도 조용히 기대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조차 오늘까지도 모르고 있었고, 그의 플랫폼으로 혜택을 받으면서도 그의 이름을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 책의 헌사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랑하는 남편 데이비드 브루스 골드버그 David Bruce Goldberg (1967년 10월 2일 ~ 2015년 5월 1일)를 그리며. 데이브, 당신을 언제까지고 사랑합니다.
이름을 알지 못했고 얼굴을 떠올린 적도 없지만, 분명 내 삶의 한 시기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사람이 이 책 속에 있었다. 뒤늦게 활자로나마 그의 존재를 마주하며, 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뿐 아니라 이제야 알아차린 연결, 그리고 그 연결을 잃은 마음까지 함께 애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