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날, 할아버지의 날

Dzien Babci i Dzien Dziadka, 사랑스러운 기념일

by 주정현

폴란드에는 참 기념일이 많다. 무슨무슨 날, 누구의 날, 이런 날들 말이다.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 어린이날, 선생님의 날...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도 있는 이런 기념일뿐만 아니라 폴란드는 산타가 선물을 주러 오는 날도 따로 정해져 있고(Dzien SW. Mikolajki, 성 니콜라스 축일), 뚱뚱한 목요일(Tlusty czwartek)이라 하여 심지어 도넛 먹는 날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짜장면 먹는 블랙데이니, 장미꽃을 주는 로즈데이니, 심지어 해당 날짜의 숫자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만들어내는 빼빼로데이 같은 것들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처럼 기념일 만들기 좋아하는 나라에서 온 내가 겨우 저 정도로 기념일이 많다고 말할 수는 없으려나.


그렇지만 폴란드에는 한국에 없는 기념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날, 할아버지의 날(Dzien Babci i Dzien Dziadka)이다. 할머니의 날이 하루 먼저, 할아버지의 날이 하루 다음에 온다. 매년 할머니의 날은 1월 21일, 할아버지의 날은 그다음 날인 1월 22일이다.

매년 1월 21과 22일은 할머니의 날 그리고 할아버지의 날. (이미지 출처: Millenuimhall.pl)


폴란드에서 할머니의 날이 만들어지게 된 건 대략 55년 전인 196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1964년 발행되었던 <여성과 삶 Kobieta i Zycie>이라는 한 주간지에서 '할머니의 날'을 만들자는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부터 주요 일간지를 통해서 할머니의 날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어 수년 내에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1월 21일이 할머니의 날이라는 문화가 안착된 이후로 할아버지의 날도 그다음 날로 정해져서 지금은 그 이틀을 함께 축하하고 있다. 여러 세대가 아우러져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곳의 사랑스러운 문화이다.


매년 할머니의 날, 할아버지의 날 즈음에 유치원에서는 크고 작은 공연을 열어 조부모들을 초대한다. 조부모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하거나 카드를 만드는 곳들도 많다. 작년 우리 꼬맹이들도 할머니의 날과 할아버지 날에 사랑을 듬뿍 담은 카드를 만들어오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사랑을 듬뿍 담은 카드는 한국까지 배달되지 못하고 재활용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얘들아, 미안.

유치원이나 학교의 각종 이벤트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시설에서도 할머니의 날과 할아버지의 날을 놓칠 수 없다. 1월 중순 이후부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선물을 미리 준비하라는 쇼핑몰 광고가 자주 눈에 띄고, 동네 키즈카페에는 이날 조부모와 함께 방문하는 테이블에는 커피와 케이크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포스터가 붙어있기도 했다. 물론 폴란드의 키즈카페라는 장소도 한국 못지않게 혼이 쏙 빠질 만큼 정신없는 곳이라 과연 노인분들이 케이크 얻어먹자고 아이들을 그 시끄러운 곳으로 일부러 데려가실까 싶지만, 분명 그 홍보 포스터를 보고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사업장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샘솟는 걸 막을 수는 없으리라. 아름다운 가족의 날을 그저 아름답게만 둘 수는 없는 이런 비즈니스 전략이야말로 어느 나라를 가든 비슷하게 관찰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아닐까.




여성의 사회진출도가 우리나라보다 높은 폴란드에서는 조부모의 손자 양육이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앞서 시행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마련된 많은 보육정책들 덕분에 어린아이들을 맡아줄 유치원과 학교가 전혀 부족한 편이 아니지만, 이곳 폴란드 부모들에게도 해외출장이나 아이들 방학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조부모의 얼굴이다. 부모의 손이 닿지 않는 그 틈새 시간 동안 아이들을 신경 써주고 함께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먼 타지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우리나라의 옛말이 그렇게 공감될 수가 없다.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건 부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온 마을까지는 아니어도 세대를 아우르는 사랑이 아이들을 향했을 때 아이들이 그 사랑의 양분을 받고 더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본다.


지난 연말, 우리 가족은 폴란드 생활 1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3주간의 시간 동안 아이들은 지난 1년간 떨어져 지냈던 할머니, 할아버지와 정을 듬뿍 쌓았다. 사실 첫째의 경우에는 내가 대학원을 다니고 일을 하는 동안 친정엄마가 큰 애를 맡아 키워주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함께한 돈독한 정을 가지고 있다. 전업주부가 된 이후에도 친정엄마는 미취학 삼 남매의 육아를 도와주시러 매일같이 우리 집에 출퇴근 도장을 찍으며 육아와 살림을 도와주셨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외할머니의 인기는 변함없이 하늘을 찌르지만, 이번 한국 방문으로 외할아버지의 인기도 참 급상승하였다. 3주간 친정집에서 먹고자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살을 부대끼다 보니 처음엔 할아버지에게 슬금슬금 낯을 가리던 아이들이, 마지막 주에는 그림책을 들고 책을 읽어달라며 할아버지 무릎 위에 폭 안겨있기도 했다. 다시 돌아온 폴란드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그리워하는 것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그곳의 맛있는 먹거리도 아닌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다.


둘째가 폴란드 귀국 직후에 할머니, 할아버지께 꼭 보내달라며 쓴 사랑의 편지


조부모가 주는 사랑은 부모가 주는 사랑에 비해 더 무조건적이고 수용적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내 부모가 어린 시절 받았으리라 짐작되는, 부모의 사랑 그 너머의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다. 그런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며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여러 가지 사랑만큼이나 크고 다양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 그리고 그 기회를 늘려주는 이 기념일이 좋다. 할머니의 날, 할아버지의 날이 참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작년 할머니의 날에는 아이들과 저 사진 속의 분홍 하트 카드를 들고 시댁에 영상통화를 드렸다. "오늘은 폴란드에서 할머니의 날이에요."라고 말씀드리자 "그런 날도 있니?" 하며 호호 웃으시는 시어머님의 모습 너머로 살짝 서운한 기색을 비치시는 시아버님이 앉아계셨다. 그런 아버님께 "할아버지의 날은.... 내일이에요! 내일도 전화드릴게요!"라고 말씀드리자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아이들 소식이 궁금해하실 시부모님께 더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데면데면한 며느리가, 한 번이라도 더 친근하게 전화를 드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핑계를 만들어주는 날이기도 하다. 아, 그러고 보니 올해 할머니, 할아버지의 날에는 우리 아이들 조부모들께만 전화를 드릴 게 아니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전화를 드려야지.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건 부모님만이 아니었다는 걸, 엄마, 딸, 며느리 말고 내게 '손녀'의 타이틀도 태어난 순간부터 있었다는 걸 이 무심한 손녀는 자꾸 까먹는다. 나 역시도 엄마 아빠의 사랑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참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걸 잊지 말자. 내가 가진 사랑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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