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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Dec 20. 2023

그레이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넌 가수가 될 수 없어

극장 후문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레이는 '미스터 화이트'라는 명패가 붙은 사무실로 옐로를 데려갔다. 붉은 암막 커튼이 내려진 창가에 커다란 집무용 책상이 있었다. 벽에는 상장과 기념사진 액자가 빼곡히 걸려 있고 장식장 안에도 훈장과 상패가 가득했다. 대부분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한 공로와 오랜 봉사 활동을 치하하는 내용이었다. 정갈한 사무실 분위기와 달리 구석에 놓인 화초와 식물들은 누렇게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그레이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르고 커다란 빵을 접시에 담아 소파 탁자에 놓았다. 오렌지와 구운 옥수수도 두 개씩 꺼내 놓았다. 페루가 포대기 안에서 야옹! 힘없이 울며 앞발로 천을 긁어댔다.

"얼씨구! 고양이도 있어?"

그레이가 피식 웃고는 납작한 접시를 가져와 우유를 따랐다.

옐로는 소파 옆에 서서 그레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이올렛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먹어. 독 안 탔어."

그레이가 따라 놓은 우유를 마시고 다시 따라주었다.

바이올렛이 침을 꼴깍 삼켰고 페루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옐로가 바이올렛과 페루를 내려주었다. 우유 접시 앞에 페루를 놓아주자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서 맛있게 핥아먹었다. 바이올렛은 그레이 눈치를 보며 빵을 한 조각 떼어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레이가 건너편에 앉아 바이올렛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따 올 테니까 편하게 먹어."

그레이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옐로와 바이올렛은 배불리 먹었다. 페루도 우유를 두 접시나 마시고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살려줘. 살려줘요.”라고 애원하는 희미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렛이 겁에 질려 옐로의 등에 바짝 달라붙었다.

"들었어?"

바이올렛이 빵을 꿀떡 삼키며 겁먹은 눈으로 말했다.

"어디서 연극 하나 봐. 극장이잖아."

옐로가 말했다.

"그런가..."

바이올렛이 목에 걸린 빵 때문에 기침을 했다.

"천천히 먹어."

옐로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레이 나쁜 사람 같아?"

바이올렛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

"난 마음에 들어. 맛있는 거 줘서."

바이올렛이 활짝 웃었다.


옐로는 벽에 걸린 사진을 구경했다. 사진마다 반짝거리는 무지개색 양복을 입은 뚱뚱한 중년 남자가 등장했다. 한결같이 엄지 손가락을 번쩍 들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스터 화이트인 것 같았다. 유명인과 정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극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검은색 실크 햇을 쓰고 붉은 망토를 두른 까마귀의 대형 독사진이 눈에 띄었다. 다른 플라스틱 액자들과 달리 도금한 고급 액자에 들어 있었다. 미스터 화이트가 까마귀를 어깨에 올리거나 품에 안고 부리에 뽀뽀하는 사진도 많았다. 쇼맨으로 꾸미지 않은 평범한 모습의 사진은 딱 한 장이었다. 하얀 셔츠와 크림색 바지를 입고 두 청년 사이에 앉아 있었다. 잔잔한 눈빛에 푸근한 미소를 띠고 있어 다른 사람 같았다. 왼쪽 구레나룻에 있는 콩알 같은 까만 점으로 미스터 화이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요.”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옐로가 두리번거리자 바이올렛이 겁먹은 표정으로 사무실 구석을 가리켰다. 죽어가는 화분들 옆에 검은 천으로 덮인 물건이 놓여 있었다. 옐로가 가서 조심스럽게 천을 벗겼다. 비쩍 마르고 깃털이 숭숭 빠진 까마귀가 새장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새장에 붙은 금속 이름표에 올리브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날 배신하다니! 죽여 버리겠어!"

올리브가 날개를 펼치며 우렁찬 남자 목소리로 외쳤다.

"용서할 수 없어! 죽여 버리겠어!"

올리브의 발음은 완벽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옐로가 다시 천을 덮었다. 올리브는 아까처럼 “살려줘. 살려줘. 잘못했어요.” 여자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 바이올렛이 배꼽을 잡고 깔깔 웃었다.

 

“무슨 짓이야! 함부로 사무실에 들이다니!”

문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옐로와 바이올렛이 얼른 소파에 가서 얌전히 앉았다.

“괜찮아. 애들이야.”

그레이가 말했다.

“요즘 어린것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고함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이 벌컥 열리고 미스터 화이트가 들어왔다. 사진처럼 무지개색 양복에 검은 실크 햇을 쓰고 금빛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주름지고 늘어진 얼굴 피부에 비해 눈동자는 젊은 사람처럼 맑아서 어딘지 기묘해 보였다. 습관처럼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지만 땀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다. 미스터 화이트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탁자에 턱 하니 두 다리를 올렸다. 그는 옐로와 바이올렛을 쓱 훑어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레이를 쳐다봤다.

“쟤들이야?”

“응.”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션 보러 왔다고? 가면은 왜 쓰고 있지?”

미스터 화이트가 지팡이로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내... 내가 노래해요.”

바이올렛이 말했다.

하하하핫! 미스터 화이트가 박장대소했다.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넌 가수가 될 수 없어.”

“왜... 왜요?”

“넌 팔다리가 없잖아.”

그가 자신의 팔과 다리를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노래는 입으로 하는데...”

바이올렛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스터 화이트가 바이올렛의 표정과 말을 흉내 내며 웃어댔다. 바이올렛은 영문도 모르고 그를 따라 웃었다. 그레이가 미스터 화이트의 귀에 뭔가 속삭였다. 미스터 화이트가 웃음을 멈추고 손수건으로 이마와 입가를 닦았다.

“어디 한번 해봐.”

그가 선심 쓰듯 말했다.

“뭘... 부를까요?”

바이올렛이 물었다.

“아무거나, 자신 있는 걸로.”

미스터 화이트가 손목시계를 보며 건성으로 답했다.


바이올렛이 노래를 시작했다. 다들 숨을 죽였다. 미스터 화이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동한 그레이는 베레모를 벗어 들고 정자세로 섰다. 옐로는 슬며시 귀를 막았다. 바이올렛의 노래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의 노래가 끝나자  미스터 화이트가 벌떡 일어나 손을 높이 쳐들고 박수를 쳤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대단한 노래였어!”

미스터 화이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우리 극장의 가수가 될 순 없어.”

그가 소파에 도로 앉으며 말했다.

“왜요?”

바이올렛이 물었다.

“가수는 말야. 노래만 잘해선 안돼. 무엇보다 외모가 중요하단 말이지.”

“왜요?”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외모에 관심이 많거든.”

“그렇지만...”

바이올렛이 어리둥절 눈만 깜박였다.

“넌 뭘 할 줄 알지? 가면 벗어봐.”

미스터 화이트가 지팡이로 옐로를 가리켰다.

옐로가 고개를 저었다.

“헛수고를 했군. 쫓아버려!”

미스터 화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레이가 뭔가 생각난 듯 미스터 화이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미스터 화이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얘를 핑크에게 데려가. 오늘은 일단 깨끗이 씻기고 푹 재우라고 해.”

미스터 화이트가 지팡이로 바이올렛을 가리켰다.

바이올렛이 옐로의 등 뒤로 숨었다.

“가면은 어떻게 할까? 둘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레이가 말했다.

“써먹을 데가 있을까?”

“생각해 볼게.”

“좋아! 쟤도 데려가! 이런! 9시가 다 됐군.”

미스터 화이트가 시계를 보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그레이가 바이올렛을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앉혔다. 겁에 질린 바이올렛이 옐로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레이의 키가 너무 커서 손이 닿지 않았다. 옐로가 탁자 위로 뛰어올랐다.

“걱정 마. 핑크가 잘해줄 거야.”

그레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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