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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Jan 04. 2024

핑크

폐가 오염돼서 그래

그레이는 숙소로 사용하는 별관으로 옐로를 데리고 갔다. 뚱실뚱실한 몸매에 복숭아 같은 얼굴을 가진 핑크가 입구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얼굴 면적에 비해 눈코입이 유난히 작아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 속 인물 같았다. 손과 발도 아기처럼 작고 통통했다. 핑크는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담배 연기를 내쉬다가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따라 그렸다. 핑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옐로는 카시오페이아를 찾을 수 있었다. 땅 쪽으로 내려온 북두칠성은 잘 보이지 않았다. 

"죽을 별자리 찾는 거야?"

그레이가 큰 소리로 타박하듯 말했다. 

또 다른 별자리를 찾느라 고개를 한껏 젖힌 핑크가 그레이를 보고 놀라 비틀비틀 휘청이다가 벽에 부딪혔다. 바닥에 놓인 깡통이 발에 차여 쓰러졌다. 담배꽁초가 수북이 쏟아져 나왔다. 핑크가 손수건을 입에 대고 허리가 반으로 접힐 정도로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손수건이 피로 물들었다.

"담배 끊으랬지! 죽고 싶어 환장했어?"

그레이가 핑크의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담배 때문이 아냐. 폐가 오염돼서 그래."

핑크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웃었다.


핑크는 공동샤워실로 옐로와 바이올렛을 데리고 갔다. 

“얘는 내가 씻길게. ”

핑크는 옐로에게 페루를 받아서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담그고 살살 흔들어주었다. 

옐로와 바이올렛은 방수커튼이 쳐진 1인용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옐로는 가면을 벗고 습진이 생긴 얼굴에 비누칠을 해 여러 차례 씻었다. 가면도 칫솔로 구석구석 깨끗이 닦았다. 머리카락과 가면에 말라붙었던 스노우의 피가 씻겨나갔다. 옐로는 진한 핏물이 점차 맑은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목욕을 마친 옐로와 바이올렛은 핑크가 준 잠옷과 카디건을 입고 하얀색 실내화를 신었다. 핑크는 말끔해진 페루에게 앙증맞은 무지개색 조끼를 입혀 옐로에게 건넸다.

“나한테서 향기가 나.”

바이올렛이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핑크는 옐로와 바이올렛을 이층 침대가 있고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창가에 놓인 책상에 오리 모양의 노란색 조명이 켜져 있고 방 가운데에는 2인용 탁자와 자주색 소파가 놓여 있었다. 주머니에서 피팅줄자를 꺼낸 핑크가 바이올렛을 요리조리 돌려세우며 몸의 치수를 꼼꼼하게 쟀다.

"옷 만들어 주실 건가요?"

바이올렛이 물었다.

"그렇단다."

핑크가 답했다.

"노래할 때 입을 옷요?"

"응. 좋아하는 색 있니?"

핑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엄마는 노래할 때 하얀색 드레스만 입었어요!"

"엄마?"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예요!"

"그래? 엄마 이름이 뭔데?"

핑크가 물었다.

"언제나 엄마라고 불러서... 이름을 몰라요..."

바이올렛이 울상을 짓고 말했다.

"그렇구나..."

핑크가 묘한 표정으로 바이올렛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핏방울이 바이올렛의 옷에 튀었다. 

"내일 새 옷을 줄게."

핑크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토하면서     

"아줌마 옆방에 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아래층 침대에 누운 바이올렛과 페루는 금방 잠이 들었다. 한참을 뒤척이던 옐로는 시네러스가 준 총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방을 나섰다. 핑크의 방에서 옥신각신 하는 두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옐로는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더 조이면 허리 꺾여!"

핑크가 나무라듯 말했다.

"상관없다니까!"

여자가 신경질을 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노래해!"

"어차피 립싱크잖아."

"가수가 꿈이라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다른 방법 있어?"

여자가 버럭 성질을 냈다.

"근데 말이야... 아까 그레이가..."
핑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옐로는 얼른 복도 커튼 뒤로 숨었다. 핑크가 문을 벌컥 열고 두리번두리번 문밖을 살폈다. 핑크가 들어간 후, 옐로는 다시 문에 귀를 갖다 댔다. 하지만 낮게 소곤거리는 여자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옐로는 공연장이 있는 본관으로 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미스터 화이트의 사무실이 있는 2층에는 회의실, 의무실, 휴게실 등이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주먹만 한 자물쇠가 달린 철문으로 막혀 있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1층 공연장으로 갔다. 벽시계가 9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연 중이라 닫혀 있는 문 양쪽에 안내요원 두 명이 서 있었다. 옐로가 들어가려고 하자 한 사람이 화난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 그때 문이 열리고 지팡이를 짚은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옐로는 안내요원들이 노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틈에 안으로 들어갔다. 


공연장 안에도 안내요원이 한 명 있었지만 무대 쪽을 향해 서 있어서 옐로를 보지 못했다. 옐로는 살금살금 벽에 바짝 붙어 걸어가 벽기둥 그림자 속에 숨었다. 앞 좌석부터 빈자리 없이 관객이 가득 차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향수가 섞인 묘한 냄새와 군중의 텁텁한 숨 냄새에 살짝 현기증이 났다. 새로운 쇼가 시작되려는지 무지개색 장막이 서서히 열렸다. 둥둥둥 커다란 북소리에 옐로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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