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장노아 Noah Jang
Jan 10. 2024
캄캄한 무대에 커다란 초승달이 높이 떠 있었다. 바닥에 설치된 인공 호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났다. 뱃고동처럼 낮은 혹등고래의 울음소리와 바이올린 연주가 흘러나오자 잔잔했던 호수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연한 푸른색 머리의 인어 남자가 호수 위로 솟아오르며 공중돌기를 했다. 하반신이 금빛 비늘로 덮여 있고 상반신엔 금빛 비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목에는 여러 겹의 유리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인어는 수십 차례 높이 뛰어올라 다양한 고난도 묘기를 선보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은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같았다. 달에서 투명한 그물이 서서히 내려왔다. 인어가 호수 위로 내려온 그물에 매달렸다. 그물이 다시 위쪽으로 올라갔다. 투명한 그물 속에 들어간 인어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춤을 추었다.
달 위에 누워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까지 오는 금빛 머리와 금빛 날개가 눈이 부시게 빛났다. 투명 그네에 올라선 여자가 날개를 펼치고 인어의 그물 가까이 내려왔다. 인어가 그네를 타듯이 그물을 앞뒤로 크게 움직이다가 여자를 향해 허공에 몸을 날렸다. 몇몇 관객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인어가 공중돌기 묘기를 하며 그네에 거꾸로 매달린 여자의 두 손을 아슬아슬하게 잡았다. 여자와 그물 사이를 오가는 묘기와 춤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마지막에 여자는 인어의 손을 잡아주지 않고 달 위로 올라갔다. 인어는 슬픈 표정으로 여자를 올려다보며 호수로 떨어졌다. 인어는 달을 향해 몇 차례 뛰어오르다 포기하고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
호수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막이 내렸다. 관객들의 박수가 계속되자 커튼이 열렸다. 여자가 투명한 줄을 타고 내려오고 인어는 올라갔다. 중간에서 만난 그들은 줄 하나에 매달려 물속에서 헤엄치듯 춤을 추었다. 박수소리가 커졌고 커튼이 닫혔다. 미스터 화이트가 무대에 올라와 네 번째 쇼인 '아름다운 레드'를 소개했다.
옐로는 공연장을 나와 분장실로 갔다. 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보니 이름표가 붙은 일곱 개의 거울이 보였다. 인어 남자와 날개 여자가 얇은 가운을 입고 거울 앞에 앉아 분장을 지우고 있었다. 여자의 거울에는 앰버, 남자는 블루라고 쓰여 있었다. 옐로는 거울에 비친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앰버는 불그죽죽한 피부에 다크서클과 기미가 짙었다. 금발 가발이 분장대 위에 놓여 있고 푸석한 호박색 머리칼은 숱이 많지 않았다. 속눈썹을 떼어내니 눈이 작아져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되었다. 무대에서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다.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블루의 맨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유리 목걸이에서 반사된 빛을 받아 더 맑고 투명해 보였다. 날카로운 콧대와 지나치게 흰 피부 탓에 병약해 보이기도 했다. 옐로는 소품 테이블 위에 놓인 인어 꼬리와 가운 사이로 보이는 블루의 다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다리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였고 옆에 목발이 놓여 있었다.
눈가에 아이크림을 바르던 앰버와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거울 속 옐로의 눈이 마주쳤다.
“어머! 깜짝이야! 얘, 너 누구니? 쥐새끼처럼 뭘 훔쳐보는 거야? 오밤중에 웃는 가면은 왜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거지? 무서워 죽겠네. 여긴 정말 요상한 인간들뿐이라니까. 미스터 화이트는 재주도 용해. 어디서 이런 애들을 계속 데려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요즘 적자라고 난리 치던데 새로운 쇼를 준비 중인가? 하긴 우리 쇼는 하도 우려먹어서 이제 끝낼 때도 됐지.”
앰버가 수다스럽게 지껄였다.
“들어와도 돼.”
블루가 옐로에게 손짓했다.
잠시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간 옐로는 소품 테이블에 놓인 인어 꼬리를 만져 보았다. 두꺼운 금색 천에 비늘 모양의 얇은 금속이 정교하게 붙어 있었다. 살짝 흔들어보니 찰랑찰랑 소리가 났다.
"얘! 만지지 마! 여기서 젤 비싼 소품이야!"
앰버가 소리쳤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게 궁금해서 따라왔구나. 그렇지?"
블루가 목발을 짚고 옐로에게 걸어와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말 인어인 줄 알았어요.”
옐로는 블루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블루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멀찍이 떨어져 섰다.
“얘, 그럼 난 날개 달린 천사인 줄 알았겠네? 그런 소리 하기엔 너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냐? 근데 가면 쓰고 무슨 쇼 준비하는 거니? 얼굴은 모르겠다만 몸매는 아주 그럴싸하구나. 서너 살 더 먹으면 아주 끝내주겠어. 남자들 애간장 꽤나 녹이겠는데? 가면 좀 벗어봐. 얼굴도 몸매같이 죽여주는 예쁜이가 될지 내가 봐줄게."
"앰버!"
블루가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사실을 말하는데. 그나저나 가면 너무 낡아서 손 좀 봐야겠다. 뭐, 핑크가 알아서 잘 고쳐주겠지만. 아! 피곤해 죽겠다. 빨리 돈 벌어서 이 짓을 때려치워야지. 날개도 무겁고 매일 똑같은 춤만 추는 것도 지겨워. 블루 너는 한창 때니까 하루에 두 탕 뛰고도 팔팔하지만 난 아주 죽겠어.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울 꼬맹이 생일이라 빨리 들어가야 해. 꼬맹이 목 빠지겠다."
앰버는 가운을 벗어 분장대 위에 던졌다. 블루가 있는데도 다 벗고 허둥지둥 돌아다녔다. 알몸에 하이힐을 신고 모자를 쓰고 나가려고 했다.
"앰버, 옷을 안 입었잖아요."
블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머!"
앰버가 깔깔 웃으며 간이탈의실에서 옷을 입고
"블루, 안녕! 예쁜아, 안녕!”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며 분장실을 떠났다.
블루가 엠버의 가운을 단정하게 걸어 놓았다.
“이름이 뭐야?”
블루가 물었다.
“옐로.”
“난 블루.”
“원래 푸른색이에요?”
옐로가 머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염색했어."
"아..."
“내 다리 보여 줄까? 짜잔!”
블루가 가운을 젖히고 왼쪽 다리 하나로 우뚝 섰다.
오른쪽 다리는 허벅지 5cm 정도만 남아 있었다.
"걷는 것보다 물속이 편해. 아가미가 있다면 바다까지 헤엄쳐 가서 평생 물속에서 살고 싶어. 저 인어 꼬리가 진짜 내 몸의 일부면 좋겠어. 가짜라 실망했지?”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어가 아닐 뿐이죠."
"고마워."
“다리 하나는 어떻게 됐어요?”
“내가 말해주면, 너도 가면 이야기 해줄래?”
블루가 손가락 끝으로 가면을 톡 치며 물었다.
옐로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지금은 서로 비밀로 하자."
블루가 하하 웃었다.
“극장 사람들과 인사했니?”
“미스터 화이트와 그레이, 핑크요. 아, 마젠타와 오키드.”
“내일 아침에 식당에서 만나. 다른 친구들도 소개해 줄게.”
블루가 옐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옐로는 마지막 쇼를 보러 가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다. 바이올렛과 페루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깨끗하게 목욕한 페루의 금속 의족이 반짝거렸다. 블루가 내일 바이올렛과 페루를 보면 좋아할 것 같았다. 옐로는 침대에 앉아 가면을 벗고 핑크가 준 연고를 얼굴에 발랐다. 블루의 깨끗한 피부가 떠올랐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물방울과 공중돌기를 하는 모습도 떠올랐다. 블루가 해변을 달려 바다로 뛰어들고 인어가 되어 높은 파도를 타고 헤엄쳐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블루가 가면을 만질 때 왜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생각하다 옐로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