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연대기 #4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세 번째 자취방은 혼자 살기에 적합했다. 좁지만 빌트인 되어 있는 가구들 덕에 수납공간이 넉넉했으며, 학교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그 집의 가장 큰 특징은 텔레비전이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자취 생활을 하면서 티비 프로그램을 본방송으로 본 적은 그 당시가 유일하다.
그 집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조금 우울한 감정이 떠오른다. 흔히들 말하는 대 2병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전공 수업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학교에 크게 정을 붙이지 못했고, 진로에 대한 혼란이 크게 왔다. 그래서 학교 수업과 알바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취방 침대에 앉아서 말 그대로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잡아먹다 보니 병이 나기도 했다. 하는 일이라고는 앉아서 생각의 꼬리를 물어내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뿐이었기 때문일 테다. 갑작스러운 몸살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방에서 혼자 끙끙 앓았었다.
어쩌면 향수병이었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고 싶었고, 미세먼지가 많은 서울이 싫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넓은 집에서 뒹굴거리고 싶었다. 결국 3학년이 되기 전에 휴학을 신청하고, 본격적인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 먹고, 자고, 생각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럴수록 우울감이 커졌다. 대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해외로 도피를 가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돈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돈만 무작정 벌어들이려니 끝없는 우울로 파고들었다. 오직 ‘돈’이 목적이 되는 삶은 적잖이 끔찍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돈을 벌고, 쓰고, 쓴 후에 얼마를 썼는지 확인한다. 앞으로 얼마나 모아야 하는지를 확인한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내 머릿속에는 모을 돈과 써야 할 돈밖에 없었다. 참 혼자 살기에 좋았지만 그 집을 떠올리면, 당시의 내가 온전치 못했기에 이런 푸르스름한 기억이 우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는 나에게 중요한 시점이다. 가장 우울했지만 가장 많은 생각들을 했고, 그 생각에서 뻗어 나온 나만의 가치를 정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일, 직업, 취미생활과 생활 등 다양한 방면으로 참 열심히도 생각했다. 일기장도 바빴다. 당시의 일기를 꺼내보면, 아주 사소한 일에서 끌어낸 느낀 점과 혼란스러운 감정이 날 것인 채로 담겨있다. 다음은 그 당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날의 일기이다.
‘오늘 두 시간이 넘게 가만히 앉아 생각만 했다. 요즘 이런 시간들이 많이 생긴다. 엄청난 고민을 하기도 하고 너무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루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행복한 미래를 위해 사는 느낌이다.’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살던 3번째 자취방에서의 나. 일기의 한 부분만 봐도 그때의 우울감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동시에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에 대한 생각을 비롯한 여러 생각 가지를 쳤다.
나만의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것, 꼭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것’이라는 개념을 깨닫는 시점과 그것을 지키려는 정도는 천차만별이겠지만, 결국 모두들 본인의 0순위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친구란 무엇인지, 관계란 무엇인지, 사랑은 또 무엇인지 하나씩 정리해간다. 직업을 가질 때 가장 중요한 것, 허용할 수 없는 범위, 하고자 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깨달아간다. 그 과정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고통받기도 한다.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의 나가 달라서 느끼는 괴로움도 꽤나 크기에. 그렇지만 결국에는 이상 속의 나를 버리고 현실의 나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타협이란 것을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