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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단절

토레스 델 파이네 1일 차

by 떼오 Theo
드디어 토레스 델 파이네의
첫 아침이 밝았다.

내가 남미여행을 온 이유.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 주변에는 이국적인 풍경과 자연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만 보던 나무와 식물들이 가득하다.

탐험가가 된 듯한 느낌.

기분이 좋다. 묘한 설렘과 떨림.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토레스 델 파이네 1일 차


마지막으로 빠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트레킹의 시작점인 국립공원 입구로 가기 위해 어제 미리 예약한 버스를 타러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순간,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분명 두 손이 무거워야 하는데 왜 손이 빌까? '아뿔싸! 어제 열심히 준비한 밥을 빼먹었다!' 다른 건 놓고 와도 밥은 절대 놓고 오면 안 된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밥을 챙기고 헐레벌떡 버스 터미널로 돌아왔다. 다행히 버스는 놓치지 않았다! 만약 숙소와 터미널이 멀었다면 그대로 버스를 놓쳤을 것이다.


시작부터 쉽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그런 다짐은 잠시,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다시 한번 정신을 놓기 시작했다.


'그래, 조금은 풀어지면 뭐 어때!

되는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이 순간들을 온몸으로 느끼자.'



버스가 도착한 곳은 드넓은 호수가 일렁이는 곳. 이곳에서부터 패리를 타고 이동한다. 트레킹을 위한 입장권을 별도로 구입해야 하는데 당시 환율로 5만 원 정도였다. 파타고니아 물가 어마무시하다. (지금 환유로 하면 10만 원 안팎이 될지도 모른다) 입장료만 구매해야 되는 게 아니었다! 페리 탑승권은 3만 원... 시작부터 8만 원이 허공으로!



하지만 페리가 이동하며 보여주는 풍경은 8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페리 2층으로 올라가 마음속으로 탄성을 지르는 순간, 내가 쓰고 있던 모자가 바람에 훨훨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내 모자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은근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페리를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지만 페리에서 내리면 각자의 속도, 각자의 방법으로 토레스 델 파이네를 걸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나 역시 나만의 방법으로 토레스 델 파이네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첫날의 잠자리를 책임져줄 산장은 근처에 있다. 덕분에 첫 째날은 훨씬 가볍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나와 동행 중 한 명은 산장을 예약했고, 다른 한 명은 텐트를 예약했다.


여행을 다니며 일정에 맞는 동행을 구하게 되었지만, 각자 상황에 맞게 잠자리를 예약한 것이기 때문에 3박 4일 일정만 동일하고 잠자리는 각각 다르다. 체크인을 맞추고 오늘 트레킹에 필요한 짐만 간단하게 챙겨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텐트자리를 예약한 동행의 자리를 구경하러 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텐트를 예약할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을 거 같다.



본격적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간단하게나마 허기를 때우고 가기로 했다. 산장에는 캠핑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취사가 가능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시설이 너무 좋더라.


뭐라 해야 될까... 마치 미국 서부 영화에만 나올 것 같은 원목형태의 아지트 느낌이랄까? 한쪽에 미국국기 대신 칠레와 파타고니아 국기가 있는 걸 보고야 여기가 파타고니아라는 것을 알아채고 만다.



우리는 각자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소중한 양식들을 꺼낸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형태의 음식도 보인다. 바로 미역국. 한국인들은 큰 일을 치르기 전에 꼭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첫날부터 한식이라고? 첫날이기 때문에 한식인 것이다!


출발하기 전인 어제, 미리 준비한 버거와 미역국 그리고 매시드 포테이토. 이 음식들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뜨거운 물뿐이다. 뭔가 엄청난 것을 해 먹을 것처럼 장비들을 꺼내보지만,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뜨거운 물을 끓여주는 일뿐이다.


이들은 좀 더 대단한 음식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싶었을 텐데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너네들의 진면모는 곧 나올 테니깐!'



음식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여기가 대자연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음식을 손에 들고 고개를 드니 미처 몰랐던 풍경이 창 밖으로 펼쳐진다. 산과 텐트 그리고 각종 캠핑장비들이 어우러져 더욱 야생미를 더한다. '우리 좀 와일드한데?'


더 이상 지체를 할 수 없어 먹은 자리를 후다닥 치운 뒤 출발할 채비를 마친다. 첫날이라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되는 게 오늘 가야 할 거리도 자그마치 왕복 20km이다. 5, 6시간의 거리일까? 바로 그레이빙하까지가 우리의 첫날 목표이다. 기분 좋은 아버지와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우리도 힘차게 출발한다.



한참 올라가다 조금 숨이 거칠어질 때면 어디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난다. 파타고니아에서 흐르는 물은 너무 깨끗하기 때문에 물을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물병만 준비하면 된다. 시원한 생명수가 곳곳에 흐른다. 목도 축이고 준비한 복숭아도 물에 적혀 시원하게 한입 베어 문다.



그렇게 또 한참을 힘차게 올라가다 보면 큰 강이 보이고 강 위로는 어디서 깨져 내려온 듯한 빙하조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레이빙하에 거의 도착했다는 신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그레이 빙하 표지판.

저 멀리 보이는 그레이 빙하.



사실 우리의 목표는 이보다 빙하를 더 가까이서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체력은 이미 바닥났고, 저 멀리 보이는 빙하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해 보였다. 큰 돌과 자갈들이 가득한 길이었고, 급경사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야 하는 길을 가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중간중간 비가 내려 돌길은 더 미끄러운 상태였다.


긴급회의.

여기서 빙하를 보는 거에 만족할 것인가, 더 가서 빙하를 가까이서 보느냐...



만장일치로 아쉽지만 여기서 구경을 하고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인증샷은 필수!


긴급회의 겸 휴식을 위해 몸을 가만히 있으니 땀이 식어 몸이 떨렸다. 더 추워지기 전에 얼른 출발하기로 했다. 산장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말을 아꼈다. 내가 의지로 말을 아꼈다기보다 말할 힘도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안전하게 내려가는데 집중했다. 복숭아를 먹었던 계곡을 지나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올라가던 곳을 지나서야 드디어 산장이 보였다!


"다들 고생했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정리를 하고, 샤워도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동행 중 한 분은 저녁신청을 따로 안 해서 준비해 온 밥을 먹었다. 미안한 마음뿐... 트래킹을 하면 아무래도 칼로리를 많이 소비할 테니 닭가슴살, 소고기, 콩 등 음식이 다 고칼로리 음식이었다. '오늘 힘들었을 텐데,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우리는 한 팀 아이가!'


숙소에 마련된 공용공간에 모여 오늘 하루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우... 꽃까지는 피우지 못하고, 꽃망울만 피우고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야 하니! 아마 오늘의 피로에 더해 내일은 온몸이 쑤실 예정이다.



지정받은 침대에 (지정을 받긴 했지만 내 방에는 나 혼자 뿐이라 어딜 써도 상관없었다) 작은 침낭을 깔고, 겨울잠을 준비하는 다람쥐마냥 주섬주섬 들어가서 잘 준비를 마쳤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곳. 핸드폰조차 터지지 않아 문명이랑 잠시 떨어진 곳. 잠자리에 들기 전 잠깐의 사색에 빠져보고 싶었지만 졸음이 쏟아져 금방 잠에 들고 말았다.


'얼마 만에 내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어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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