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레스 델 파이네 2일 차
아아 -! 2일 차 브리핑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이탈리아노 캠핑장까지 8km.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휴식할 것!
두 번째, 동행 분들과 함께 프란체스 캠핑장까지 걸은 뒤 그곳에서 저녁을 해결할 것!
세 번째, 홀로 걸어 로스꾸에르노스 산장까지 이동할 것!
이상.
2일 차 아침이 밝았다. 생각보다 몸이 괜찮았다. 오늘은 하루를 꽉 채워 트레킹을 하는 날의 첫날이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갈길이 멀다! 출발하기 앞서 전장으로 나가는 전사들 마냥 굳건하게 사진 하나를 남기기 위해 근처에 계시던 한 가이드 분께 사진을 요청드렸다.
"자자, 우리가 가야 할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을 배경 삼아 멋지게 찍고 출발하자고!"
우리가 사진구도를 정하고 있는 사이, 가이드 분께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더라. 사실 이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다가 발견해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당시에는 우리 사진만 확인하고 마음에 들어 한 목소리로 '무초 그라시아스!'를 외쳤다.
첫 번째 목적지, 이탈리아노 캠핑장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가 걸린다는데 과연...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신다. 어제보다 한결 공기가 시원하다. 날씨도 좋고, 코스도 완만하니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핸드폰으로 한국에서 미리 다운로드하여온 노래를 트는 여유까지! '룰루 랄라~' 이제야 토레스 델 파이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방이 꽤 무거웠지만, 이 상황과 잘 어울러서 꽤 만족한다.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몸이 적응했나 보다.
'어제와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이야기도 하면서 걸었더니 벌써 쉬는 시간이다. 더 걸을 수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풍경 때문에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높은 하늘, 기분 좋은 바람, 적당히 숨이 차오르는 지금! 바로 와인을 마시기 좋은 조건이 아닌가 말인가.
토레스 델 파이네로 넘어오기 전 미리 마트에서 구입해 온 1.5L짜리 팩 와인을 오픈할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사실 이 녀석 때문에 가방이 좀 무겁기도 했다. 절대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방의 무게를 줄이기 위한 것...!
이런 뷰 아니, 단순히 뷰가 아닌 이런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 들어와 마시는 와인이라니... 세상 Chill 하지 않는가. 혼자 아련해지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데 순간 속으로, '저 산 오늘 넘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렴 어때! 와인의 힘으로 vamos!
좋았던 기억이 1분 채 되지 않았는데 우리 눈앞에 펼쳐진 급경사의 언덕과 을씨년스럽게 자기 맘대로 휘어져 있는 나뭇가지들. 그래도 힘을 내서 출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난이도 높은 경사코스를 지나니 조금 쉬운 코스가 이어지더니 어느새 들리는 물소리. 그리고 한참을 다시 걷기를 반복. '분명 물소리가 났는데?'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말도 안 되는 풍경, 뒤에 웅장한 설산을 배경으로 앞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 어마어마하다. 아마 추측건대, 저 위 설산의 눈이 녹아 계곡이 되어 이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이 다리만 건너면...! 이탈리아노 캠핑장에 도착!
서둘러 점심을 먹기 위해 준비했다. 캠핑장 곳곳을 보면 취사가 가능한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서 우리도 자리를 잡아 앉았다. 이번 점심은 라면과 밥, 그리고 산장에서 받아온 런치박스 샌드위치. 푸짐하다 푸짐해!
남은 와인까지 한잔하니 몸이 노곤노곤... '안돼, 이대로 퍼질 수 없어. 여기서 아직 할 일이 남았단 말이야!'
사실 이 캠핑장에서 점심을 먹은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이탈리아노 캠핑장에서 이어지는 '브리타니코'라는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가방은 여기 캠핑장에 따로 모아두고 몸만 후딱 다녀올 예정이다. 대부분 그렇게 코스를 가져가기에 모아둔 가방들이 종종 보인다. 우리도 분실되지 않게 모여있는 가방틈 사이에 잘 숨겨(?) 두고 전망대로 향했다.
금방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30분 정도는 올라가야 한다. 코스도 꽤 경사에 난이도가 있다. 와인과 라면의 힘으로 '영차!' 올라갔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아까 쉬는 시간에 와인을 먹으면서 보았던 웅장한 돌산이 내 눈앞에 등장했다. 저 멀리 보이는 포카리스웨트 호수까지. 카메라에 절대 안 담기는 풍경이다.
갈길이 멀다. 전망대에서 잠깐의 스몰토크를 했던 다른 트레커들과 인사를 하고 다시 캠핑장으로 내려왔다.
다른 트래커들 사이에 꽁꽁 숨겨든 짐을 어깨에 둘러매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다음 목적지는 동행들의 2일 차 숙소인 프란체스 캠핑장. 나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지만, 어차피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이른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2시간 정도 걸렸을까? 이전 거리보다 상대적으로 금방 걸린 것 같았다. 저녁메뉴는 보기만 해도 배부른 스파게티. 양이 어마어마하다. 걸으면서 칼로리를 썼으니 이 정도는 먹어야 하지 않을까? 역시 마무리는 와인이지.
일정이 거의 마무리되어서 그런지 기분이 조금 업된 상태였고, 이야기가 끊이질 않으니 남은 와인도 다 먹고 말았다. 약간의 취기가 돌았다. 기분 좋은 취기.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되기 때문에 다시 출발했다. 동행들과는 내일 아침 내가 머무는 산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차피 가는 길이기 때문에. 오늘의 진짜 마지막 목적지인 로스꾸에르노스 산장로 출발했다.
시간이 거의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날이 밝았다. 숲 속에는 인공적인 소리라고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가끔씩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소리, 새소리 정도.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온전히 나만 있는 이 순간을 즐겼다.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 먹은 와인 때문일까? 혼자 있는대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혼자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텐션이 점점 높아졌다. 고요한 이 순간이 좋았지만, 아마 조금 무서워서 그러지 않았을까? 이 넓은 숲 속에 고립될까 봐.
맞게 가고 있는지 중간중간 이정표를 확인하며 가니 눈앞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졌다. 갑자기 호수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은 거 같아 잠깐 멈추기로 했다.
괜히 돌수제비도 한번 던져보고, 세수도 하고, 앉아서 호수를 보며 멍을 때렸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나밖에 없다는 게 신기했고 공허함보다는 뭔가 모르게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감사했다. 지금까지 안전하게 여행을 하고 또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로스꾸에르노스 산장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여기에서도 저녁을 신청했었다. 잊고 있었다. 이미 배부르게 먹었는데...
그래도 메뉴를 보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맛. '과거의 나, 칭찬해~'
밥은 누가 봐도 고급식단이었지만, 잠자리는?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텐트.
식사와 잠의 빈부격차.
이제야 생각났다. 하루쯤은 텐트에서 자야 하지 않겠냐고 합리화하며(산장예약이 마감되어서) 예약했던 것이... 그리고 밥이 중요하다면서 저녁은 모두 신청했던 것이... 다 생각났다.
트래킹을 하는데 그래도 캠핑은 해야 진정한 와일드 맨 아니냐며, 한국에서 올 때 바리바리 챙겼던 싸구려 침낭. 무사히 잠들 수 있을지 진심으로 걱정된다. 우선 지금 있는 옷 다 껴입고 최대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체온을 유지했다. 내일 아침, 살아서 일어날 수 있기를! 와인이 남았다면 와인의 힘으로 잠에 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2일 차도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