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레스 델 파이네 3일 차
오늘은 7시간의 장거리 코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계속 5~7시간 정도는 걷고 있다. 그래도 걸을만했던 이유가 같이 걷는 동행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리를 걷다 보면 체력적으로 힘든 거보다 지루함이 더 큰데 같이 걸으면 지루함을 크게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고 산장에서 기다리니 마침 동행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하는 말이, 오는 길에 보인 큰 호수가 너무 이뻤다고. 그런 호수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닐까?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살짝 남았다.
아쉬움은 뒤로 하고,
'자 3일 차도 힘차게 출발해 보자고!'
오늘은 로스꾸에르노스 산장에서 칠레노 산장까지 이동한다. 하지만 중간에 어딜 들렸다 이동하고 그런 코스가 없고 곧장 산장으로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약간의 여유가 있다. 굳이 급하지 않아 여유롭게 걸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갈림길. 생각보다 일찍 나온 갈림길이다.
나는 3일 차 숙소가 칠레노이고, 동행들 숙소는 라스토레스이기 때문에 이 갈림길에서 헤어져야 했다. 여기서 점심을 같이 먹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약속도 정했다. 어차피 동행분들도 삼봉(토레스 델 파이네의 유명한 3개의 봉)을 가기 위해서 중간에 칠레노를 들렀다 가야 되기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칠레노 산장 입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약에 20분이 지나도 안 오면 그냥 올라가기로 했다. 핸드폰이 안 터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약속을 정해야만 했다.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어차피 정상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약속을 마치고 인사를 한 뒤 다시 혼자 걷기 시작하였다.
생각보다 일찍 혼자 걷기 시작했다.
같이 걷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걷는 것도 충분히 매력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칠레노까지의 코스가 너무 힘들었다. 완만한 길에서는 나 자신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지만, 이런 길에서는 불가능하다. 정신을 잠깐 딴 곳에 두면 생각하기도 싫은 아찔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경사는 더 심해졌고, 특히 혼자 걸으니깐 오버페이스를 하게 되어서 더 힘들었던 거 같다. 이럴 때는 같이 걷는 게 좋다. 서로 의지할 수 있으므로.
엄청난 협곡이다. 발 헛디디면 그냥... 조심 또 조심.
여기 길이 좁은데 바람까지 많이 불어서 밤에 안 보이면 진짜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내일 새벽에 이 길을 걸을 동행들이 걱정되었다. 이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이제 슬슬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칠레노산장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바람이 엄청났고, 기온도 많이 낮아져서 추웠다. 체크인을 마치고 샤워를 했다. 한 두시쯤에 도착했기에 시간은 여유롭였다. 다만 혼자라서 할 게 없었다.
'이럴 때 같이 놀아야 되는데.'
내일 내 생각에는 잠을 못 잘 거 같기 때문에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낮잠을 자기로 했다.
배꼽알람이 잠에서 깼다. 아주 정확하게 저녁시간을 알려주었다. 저녁은... 항상 그랬듯이 고열량 고기와 콩, 수프 등등.
그런데 어디서 낯익은 한국어가 들리는 것이었다. 언급은 안 했었지만 하필 1일 차에 만났던 부부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눈살 찌푸리게 하는 대화들을 일방적으로 던져서 곁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부부를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이럴 때는 차라리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다시 마지못해 그저 끄덕끄덕... 낮잠을 자며 풀었던 피로가 다시 쌓이는 듯한 이 기분.
어찌어찌 그 끔찍한 시간을 마무리 짓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로 향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드디어 내일 새벽에 삼봉을 보러 올라가야 되기 때문에 슬슬 자야 한다. 지금 시각은 저녁 8시.
지금 이 날씨로는 과연 내일 일출과 함께 삼봉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올라가 봐야지. 올 때까지 왔다. 이 순간을 위해서 한국에서부터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겠다. 과연 삼봉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