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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 삼봉이

토레스 델 파이네 4일 차

by 떼오 Theo
새벽부터 비가 세차게 몰아친다.


잠을 설칠 정도로. 동행들과의 약속시간에 맞춰 산장 밖으로 나왔다. 짙은 암흑.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비바람 역시 세차게 몰아친다. 비가 산장을 때리는 소리에 다른 트래커들이 깨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도 그럴 것이 몇몇 트래커들은 주방으로 나와 멍을 때리고 있다. 이 상태로라면 일출은커녕 삼봉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약속시간이 점점 흐르기 시작한다. 어제 이 산장까지 오는 길에 했던 걱정을 다시 한다. 낮에 와도 길이 험한데 깜깜한 어둠에 비바람까지 부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괜히 불안한 생각마저 든다. 약속시간보다 20분이 지나면 먼저 출발하기로 했기에 더 기다릴 수 없어 혼자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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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랜턴을 준비하지 못해 핸드폰에 의지해 나아간다. 집중해야 한다. 지금 이곳에는 나뿐이고, 들리는 소리는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쳐 나는 날카로운 소리와 잎사귀 소리들. 너무 무섭다. 갑자기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맞다고 생각하고 가고 있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전과는 다른 길이 나왔고, 상식적으로 이쪽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 나왔다. 이정표는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맞는 길인지 계속 헷갈렸다.

'이 길이 아니었어...' 잠깐 호흡도 돌릴 겸 앉기 좋은 평평한 돌을 찾았다. 그리고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꽤 올라왔다. 아! 그리고 옆에 다른 불빛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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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빛들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가만히 지켜보니 내가 있는 곳 옆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가 아니었어...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다시 조심조심 돌길에서 내려와 나의 생명 불빛들을 따라서 올라간다. 점점 길 같은 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파르던 경사가 점점 완만해지더니 넓은 평지가 눈앞에 있다는 느낌이 왔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상으로 맞게 도착한 듯하다.


아직 동행분들은 도착하지 못한 거 같다. 정상이라 그런지 바람을 막아줄 만한 지형지물이 없어 땀이 식으면서 너무 추웠다. 겨우겨우 바람을 피해 줄 만한 바위를 찾아 그 속에 몸을 숨겼다. 동행들이 걱정돼 소심하게 이름도 불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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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나 혼자라도 이 순간을 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올라올 때의 비바람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서서히 안개가 겉히더니 삼봉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이걸 보기 위해 4일 동안 그렇게 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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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까지 뜨면서 삼봉에 햇빛이 살짝 걸쳐 장관을 이루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

다 같이 삼봉을 기념하며 짠 하려고 산 맥주인데... 파타고니아를 배경 삼아 파타고니아 맥주를!


용기를 내서 주변 분에게 사진도 부탁하고, 남은 시간 동안 조금 더 여유롭게 삼봉을 감상했다. 하지만 추워서 안 되겠다. 기다려도 동행은 보이지 않아 먼저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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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으니 내가 고생하면서 올라왔던 길이 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다시 칠레노 산장.

런치박스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이제 진짜 하산!


이제 정말 토레스 델 파이네와의 작별 시간이다. 웰컴센터라는 곳에서 첫날 입장료를 샀던 곳으로 돌아가 그 그곳에서 다시 푸에르토나탈레스 시내로 이동한다. 푸에르토나탈레스로 가는 버스를 타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 동행분들이 같은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어도 안 보였는데 여기서 같은 버스를 타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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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깐 내가 삼봉에 있을 때 그곳에 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행들은 나와는 방향이 다른 곳으로, 조금 더 올라가서 삼봉을 보았다고 한다. '아 그때 조금만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면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그리고 밀려오는 안도감.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못다 한 이야기는 푸에르토나탈레스 시내로 돌아가 맛있는 것을 먹으며 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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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같던 토레스델파이네에서의 3박 4. 이렇게 다시 문명으로 돌아오니 와이파이의 소중함도 알았고, 식당이나 편의시설들의 소중함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가서 아쉽긴 하지만, 소중한 추억이 하나 더 생겨서 행복하다.


'남미에 가게 된다면 꼭 가야지.'라고 생각한 곳이 2곳 있었다. 한 곳은 마추픽추. 다른 한 곳은 토레스 델 파이네. 그리고 두 곳을 다 가게 되었다. 이제 뭔가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행은 아직 남아있다.


'또 알아? 생각지도 못한 곳이 가장 좋았던 곳으로 바뀌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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