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은 반복되는 것
하늘은 또 한 번 우리를 도울 것인가?
토레스 델 파이네의 끝판왕 봉우리를 삼봉이라고 부른다면, 피츠로이는 불타는 고구마로 유명하다.
불타는 고구마란, 일출에 그을려 붉은색으로 밝게 빛나는 피츠로이의 봉우리를 말한다. 이 역시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도대체 덕을 얼마나 쌓아야 한단 말인가.' 만약 이번에도 성공하면 6대가 덕을 쌓은 것인가? 나의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두고 봐야 하는 일.
거의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내고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이른 시간이라고 하기에도 뭐 하다) 숙소를 나섰다. 당연하게도 어둠으로 가득 찬 엘찰튼. 또다시 시작된 핸드폰 플레쉬와의 동행이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모든 감각에 날카롭게 반응한다. 거북이걸음으로 겨우겨우 트래킹 코스 초입에 도착.
사람이라는 존재는 우리뿐이었다. 오히려 다른 존재들이 등장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유독 달이 밝게 빛난다. 달빛이 이렇게나 밝았었나. 달이 비추어주는 방향으로 우리가 가진 핸드폰 플래시를 비쳐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는 길의 표지판이 잘 되어 있었지만 주변 지형지물을 확인할 수 없어 공간감이 떨어지는 탓에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건지 계속 의심해야 했다. 우선 카프리 호수까지 가서 다시 방향을 잡아보기로 했다. 사실 카프리 호수에서 보는 일출도 충분히 이쁘다고는 하는데... '아니 무슨 소리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올라가 불타는 고구마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
카프리 호수까지는 생각보다 금방 왔다. 어두워서 호수는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언뜻 보면 여기가 호수인지 빈 공터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달빛에 살짝살짝 일렁이는 물결이 보여 여기가 호수라는 것을 인지시켜주었다. 저 멀리 흐리게 피츠로이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까?'
10km 정도 남은 거 같은데 믿지 않았다. 트래킹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정표에 쓰여있는 남은 거리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그럴 것이 남은 30분 정도가 가장 힘든 코스일 확률이 크다.
슬슬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는데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올라온 거지?'
의아해하면서 올라가던 중 한 한국분들 무리와 만나게 되었다. 서로에게 길을 물어 의지하고 싶었지만 서로가 길을 몰라 몇 번 다른 길로 빠졌다. 그래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오히려 너무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시간에 맞춰서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정상에 도착했을 당시에도 너무 추워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험 덕에 옷도 여러 겹 겹쳐 입었더니 훨씬 나았다. 최대한 열을 보존하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사실 마지막 마의 1km는 의지와 상관없이 천천히 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다리도 무거웠다. 거의 기어가다시피 올라갔다.
그리고 눈앞에 두둥!
어둠 속에 숨겨왔던 피츠로이 봉우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점점 날이 밝아지니 일출에 그을려 붉게 변하는 피츠로이. 불타는 고구마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 또한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데 하늘이 또 한 번 우리를 도왔다. 우리 집안은 6대가 덕을 쌓았었던 말인가!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불타는 고구마를 뒤로 한채 하산하기로 했다.
긴장이 풀렸던 탓일까...
내려오는 길에 만난 통나무 다리가 그대로 돌아가더니 동행이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아?"
"......"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그대로 바닥에 찍어버려 박살 나고 말았다. 이미 여행 중 한번 잃어버려서 바꾼 핸드폰이라고 했는데 한번 더 망가지고 만 것이다... 다른 건 다 잃어버려도 핸드폰이 없으면 여행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심지어 여권보다도.
안 그래도 지친 컨디션에 핸드폰까지 망가지니 동행분은 크게 낙심한 듯 보였다. 한껏 처진 어깨와 한숨.
"나 그냥 한국 가야겠다."
계속 격려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남은 거리는 각자 거리를 두고 조용히 내려갔다. 이런 상황에 눈치 없이 길은 또 왜 이렇게 어려운지! 길을 잃어 돌다 돌다 2시간은 더 걸린 거 같다. 분명히 표지판을 따라 맞게 내려갔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서브폰!!
'나 한국에서 서브폰을 가져왔었지? 좋은 핸드폰은 아니지만 그거라도 쓰라고 줘야겠다.'
마을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고,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서브폰 이야기를 동행한테 꺼냈다.
"나 혹시 몰라 서브폰을 가져왔거든? 근데 나는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필요 없을 거 같고... 좋은 핸드폰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쓰면 괜찮을 거 같은데?"
동행분이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했으나 조금은 관심이 있어하는 표정이었다.
"진짜 괜찮아? 그럼 이따 숙소 가서 한번 볼래!"
눈앞에 걱정이 살짝 가시자 배가 고팠나 보다. 동행은 약간 들뜬 표정으로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먹고 싶은 메뉴도 살짝 건넸다. "양파튀김도 먹고 싶다!"
그 어떤 위로로도 격려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용기를 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먹고 싶어 했던 양파튀김도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어젯밤 늦게 도착해 보지 못했던 엘찰튼 시내도 짧게나마 둘러봤다. 어제는 몰랐는데 아기자기하고 이쁜 동네다. 마을에서도 언제나 피츠로이가 보이는 멋진 동네, 엘찰튼.
숙소로 돌아가 서브폰을 동행분에게 건네주었다. '무사히 개통이 돼야 될 텐데...'
처음에는 잘 안되는가 싶더니 어떻게 잘하더니 드디어 개통이 되어 핸드폰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도 내 일처럼 너무 기뻤고 뿌듯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도움만 받고 다녔는데 이렇게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이렇게 선행이 돌고 돌면 그럴싸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꼭 고장 난 핸드폰도 살려내서 피츠로이에서 찍은 사진들도 복원할 수 있기를!'
이렇게 또 한 번에 트래킹이 끝났다. 문명과 적당히 떨어져 보낸 나날들.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느낀 감정들과 경험들. 무엇보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기회. 이 모든 것이 값진 보물이다.
이제 다시 도시로 떠난다. 엘찰튼을 떠나 엘칼레파테 공항 그리고 부에노스로. 지금까지 만난 동행들과 헤어지고 혼자만의 시간이 남았다. 쓸쓸하겠지만 그동안의 기억들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남은 일정도 잘 마무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