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1) 릴케의 시에 나타난 나르키소스
독일의 시인인 릴케는 두 편의 시를 '나르키소스' 라는 제목을 붙여썼다. 그 중 앞에 소개할 것은 쓰다 도중에 그만 쓴 것이고 뒤에 소개할 것은 완성된 작품이다. 두 작품은 다음과 같다.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는 죽었다.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자신의 본질로의 접근이 부단히 이루어졌고,
헬리오트로프의 향기 마냥 진했다.
그에게 그러나 주어져 있었다,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이.
그는 사랑했다, 그에게서 나오고, 다시 회귀하는 것을
그리고 더 이상 순풍 속에서 견디어 내지 못했고
그리고 형상의 주변에 황홀히 감싸여
그리고 일어났으나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나르키소스」
이것이 그러니까 ;이것이 나에게로부터 나와
허공 속에 분해되고 그리고 이것을 숲들의 감정이,
나를 가벼이 회피하고 더 이상 내 것이 되지 않으며
그리고 현란하다, 그것이 어떤 적개심과도 마주치지 않기에.
이것이 부단히 나를 떠나지만,
나는 떠나지 않겠어, 나는 기다릴래, 나는 머무를 거야;
그렇지만 모든 나의 한계들이 서두르고,
밖으로 뛰어나가 보지만 벌써 거기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꿈에서조차도. 아무 것도 우리를 충분히 연결하지 못한다.
내 안의 허물어지기 쉬운 중심, 나약함으로 가득한 핵심,
그것은 자신의 과육11)(果肉)을 붙잡지 않는다. 도피, 오 도약.
내 피상의 모든 부분들로부터.
저기서 형성되고 그리고 분명히 나와 똑같이
그리고 울먹이는 표정들로 위를 향해 전율하는 것,
그것은 그러니까 아마도 어떤 한 여인의
내면에 생겨날 법한 것; 그것은 획득되어질 수 없었다.
나도 잇달아 똑같이 재촉하며, 그녀 안을 향해 버둥대듯이.
지금 그것은 내버려져 있다. 무정하고도
흩어져 있는 물 속에, 그리고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봐도 된다. 나의 장미 화관 아래서.
저기서 그것은 사랑 받지 못한다. 저기 아래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급히 서두르는 돌멩이들의 무관심 외에는,
그리고 나는 볼 수 있다, 얼마나 내가 슬퍼하는지를,
이것이 그들의 외관에 있는 나의 상(象)이었던가?
그것이 그러니까 그들의 꿈속에서 이 쪽으로 고양되었는가
달콤한 공포로? 나는 벌써 거의 그들의 그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마치 내가, 나를 나의 시선에서 잃어버리듯이;
내가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살인적이라는 사실을.
'나르키소스'를 소재나 주제로 한 릴케의 시는 그의 전집을 통해 여러 편이 보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앞에서 인용한 두 편의 시는 1913년 4월에 쓰여졌는데 릴케가 표현하려는 나르키소스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12)
11) 과실의 살, 과실과 고기.
12) 전의 글, 70쪽.
출처 : 정영인. "나르키소스 신화를 모태로 한 자아 탐색 표현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국민대학교 대학원, 2003. 서울
한 남자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데 몰두해있다. 그러한 남자의 모습을 애타는 눈빛으로 지켜보는 여인이 있다. 여인은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의 무관심에 말은 못한 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곁에서 간절함을 표현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오직 물속의 제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스로마신화 속에 등장하는 숱한 이야기 중에는 안타까운 감정을 유발하는 사랑이야기가 적지 않다. 연못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끝내 죽음에 이른 사내와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오직 메아리로만 남게 된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사랑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이 신화는 큐피드와 프시케, 아폴로와 다프네, 비너스와 아도니스, 피라모스와 티스베 등과 함께 문학예술에 많은 모티프를 제공한 이야기에 속한다.
잘 생긴 외모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르키소스. 지독한 자기애로 결국 허망한 죽음에 이른 신화 속의 인물이다.
‘자기도취증’을 뜻하는 심리학 개념인 나르시시즘(narcissism)도 나르키소스의 신화에서 유래되었다. 적당한 나르시시즘은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자존감을 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나르키소스(Narcissus)처럼 자기만족의 허상 속에 갇혀 결국 자신을 병들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은 부정적 측면이 강하다.
아름답지만 수다스러웠던 에코는 제우스의 애정행각을 들키지 않게 하려 했던 행동으로 헤라의 저주를 받아 타인의 마지막 음절만 되풀이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형벌로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했지만, 그의 끝음절만 반복하다 끝내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밝히지 못한 채 죽어 목소리만 남겼다.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이뤄지지 못한 비련은 때때로 여러 상황으로 비유된다. 자아도취에 빠진 채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속마음 대신 오해할 수 있는 말만 되풀이하여 불신과 거짓을 확대하는 사람을 대변한다. 자기애에 빠진 나르키소스나 진실을 전달할 수 없는 에코는 허상과 거짓으로 뒤섞인 현대사회의 한 측면이다.
출처 : 변종필,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비련(悲戀)", 중부일보, 2017.03.30, https://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4788
카라바조의 초기작 ‘나르키소스’를 보자. 그리스 신화를 보면 나르키소스가 사냥을 나간 어느 날 샘물을 발견하고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한다. 결국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의 구성은 아주 단순하다.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르키소스의 몸은 빛을 받아 환하게 빛이 나지만 깊은 심연에 비친 얼굴은 어둡고 자세히 보면 그리 행복한 표정이 아니다. 간절하게 심연을 살펴보지만 거기서 마주친 것은 어두운 자신의 내면이다.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는 앞으로 펼쳐질 카라바조 생애의 빛과 어두움을 암시하는 것일까. 마치 그의 자화상과도 같다.
출처 : 정유진, "카라바조의 빛과 어두움", 데일리투머로우, 2024.12.19, https://www.dailytw.kr/news/articleView.html?idxno=30868
신화 속 나르키소스(Narkissos, 나르시스)의 사랑 이야기는 여러 형태로 전한다. 이 이야기는 결국 수선화 식물의 탄생화 유래담을 일컫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는 아름다운 소년의 목동이었다. 그는 매일 양떼를 몰고 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나르키소스는 양떼와 같이 샘물로 갔고, 거기서 종종 여러 님프를 만났다. 그때 그는 여러 님프들의 애절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님프를 농락했다. 동성의 아메이니아스(Ameinias)는 사랑을 거절당하자 자살했다.
숲과 샘의 님프인 에코(Echo)도 나르키소스를 사랑했지만, 헤라(Hera)로부터 말할 수 없는 형벌을 받아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결국 에코는 그로부터 무시당하자 실의에 잠겨 여위어 가다가 형체는 사라지고 메아리만 남게 됐다.
나르키소스에게 속았거나 사랑을 거절당한 어느 님프가 이 원한을 갚기로 마음먹었다. 여신 네메시스(Nemesis)가 이를 들어 주었다. 무대는 깊은 숲속의 샘물이었다.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그 샘물로 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물을 막 뜨려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물속에는 하얀 얼굴에 금빛 머리카락, 빛나는 두 눈을 가진 님프가 있었다.
그때 나르키소스는 “대체 누굴까, 신기하기도 하다”라고 중얼거렸다. 물속에 비친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인 줄을 모르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님프인 줄로만 알고, 그 그림자와 입을 맞추어 보았다. 손을 넣어 껴안아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라졌다가 다시 매혹하듯이 나타났다. 그런데 자신의 그림자를 좋아한 나르키소스는 그러기를 거듭하는 동안 몸이 쇠약해져서 끝내 샘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나르키소스가 죽은 자리에서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한 송이의 청초한 꽃이 피어났다. 이 꽃이 바로 나르시스(나르키소스), 곧 수선화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꽃으로 사원을 장식하고 장례용으로 썼다. 기원전 1500년 무렵의 그리스 유적에 수선화를 그린 벽화가 남아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수선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마호메트이 가르침 중에 이 꽃이 등장하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두 조각의 빵이 있는 자는 그 한 조각을 수선화와 바꾸어라. 빵은 육체에 필요하나 수선화는 마음에 필요한 빵이다”
영어 이름은 그리스어의 ‘마취’와 신화 나르시스에서 유래하며, 우리말로는 물에 사는 신선이라 하여 수선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는 ‘수선화는 불사의 신과운명의 인간에게 빛과 고귀함을 준다’고 했으며, 영국 시인 워드워즈는 ‘내 마음은 기쁨에 넘쳐 수선화와 함께 춤춘다’라고 노래했다.
출처 : 송홍선, "반응 없는 사랑의 슬픈 이야기 ‘수선화’", 서울타임스, 2011.03.14, http://www.seoultime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43
누구에게나 운명적인 사랑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한 쪽만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면, 둘 모두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신화가 있다.
아폴로와 다프네의 일화는 이와 같은 엇갈린 사랑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맞는 순간 처음 본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게 하는 큐피드의 화살은 올림포스 산의 신들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평소 장난꾸러기이자 그에 못지않게 자존심도 강했던 큐피드는 어린아이에게 뾰족한 화살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신을 놀리던 아폴로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큐피드는 틈틈이 기회를 엿보았고, 날씨 좋은 어느 날 아폴로에게 그 화살을 쏘게 된다. 동시에 그 반대로 화살을 맞는 순간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그로부터 무조건 도망가게 하는 끝이 뭉툭한 화살을 아름다운 요정 다프네에게 쏘았던 것이다.
화살을 맞는 순간 다프네를 보게 된 아폴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한 사랑의 감정에 휩싸였고, 자신을 피하는 다프네를 지치도록 계속 쫓았다. 또한 영문 모를 두려움에 떨며 아폴로에게서 무조건 도망을 쳤던 다프네는 아폴로에게 잡히려는 순간, 신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며 애원을 했다. 그러자 그 순간 다프네는 월계수 나무로 영원히 변해버렸다. 이는 아폴로가 다프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하자 가슴 깊은 상처를 입고, 그를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다프네를 손쉽게 잡을 수 있도록 그녀를 월계수 나무로 변하게 해달라고 아버지(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간청했던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쪽의 일방적인 욕망은 이룰 수 없는 애달픔으로, 끝내 어느 누구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하고 파국을 맞이했다.
신의 추격과 요정의 도망은 화가 폴라이올로(Antonio del Pollaiuolo, 1432~1498년경)의 작품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조적인 모습으로, 또는 신들도 인간과 같은 세속적 욕망을 지낸 존재로서 나타났다. 여기서 아폴로와 다프네는 생명력이 넘치듯 근육질의 젊은이이자 힘찬 에너지가 활발한 모습으로 표현됐다. 또한 예술가의 풍부한 상상력은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는데, 다프네의 팔이 잎사귀가 무성하게 돋아난 월계수 가지로 변하면서 이는 흡사 날개로까지 보이고 두 주인공을 마치 순간적으로 공기 중에 떠올라보이게 한다. 그러나 결국 다프네는 나무가 돼 아폴로의 포획에서 피하고 대신 자연이 되는 운명을 표현하고 있다. 다프네의 월계수는 육체적인 사랑보다 우월한 정신적인 사랑의 상징물인 것이다. 아폴로와 다프네의 신화는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육체적 사랑에 대한 순결의 승리를 의미하면서 예술가들의 꾸준한 사랑의 주제가 됐다.
출처 : 김미선, "[명화탐방기] ㉔ 이룰 수 없는 사랑, 아폴로와 다프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사, 2019.05.15, https://www.jbpresscenter.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05
세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역사 21화 스페인, "카를" 편에서 '플루스 울트라(이 너머로 나아가라)'를 나의 모토로 삼고 끊임없이 여행하며 강철로 된 무지개, 나의 운명을 사랑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을 보다가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듯 수선화가 돼 가는 모습을 통해 운명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읽는 시 3화 이상, "거울" 편에서 자유 의지로 아름다운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고 적었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통해 자유 의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네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영화2 9화 블레이드 러너 2049 편에서 마네의 선상 작업실의 클로드 모네를 참고하여 운명과 자유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수면에 반사된 빛, 물의 움직임과 빛의 반사 등을 이용해 자화상을 그리고자 한다고 적었다.
나르키소스와 다프네를 참고하여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을 보다가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듯 운명과 자유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수선화가 돼 가는 모습을 자화상에 그리고자 한다.